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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이수경의 ‘이동식 사원’ : 보살의 자리에서 부처의 뒷모습을 보다

기자명 주수완

부처님 뒤편 바로보는 나는 보살일까 나한일까

존상 뒷모습 담아낸 병풍 불화로 부처님 뒤에 앉을 권리 부여
객석이 아닌 무대 뒤에서 꾸밈없는 부처 그 자체 보게 만들어
조각과 달리 그림에는 뒷모습 그리지 않아 더 특별한 재해석

이수경, ‘이동식 사원’,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각폭 175×80㎝. 2008년. 비단에 석채.
이수경, ‘이동식 사원’,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각폭 175×80㎝. 2008년. 비단에 석채.

종교 성상은 항상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우리는 아래에 존재하고, 신은 위에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비록 우리가 이미 부처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셨지만, 누구도 감히 스스로를 부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하신 스님도 계시고, 심지어는 실제로 현현한 문수보살의 뺨을 때린 스님들도 계시긴 했지만 그 충격요법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불어 부처를 둘러싼 보살, 나한, 신장들도 모두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를 무의식중에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법당에서 우요를 행하기 위해 불단의 뒤로 걸어들어가곤 할 때면 불단에 봉안된 불상을 측면에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보기 어려운 곳이 바로 부처님의 뒷모습이다. 특히 불단 뒤에 후불벽이 버티고 있어서 불화가 걸려 있기 때문에 뒷모습은 늘 그 후불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처님의 뒷모습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다지 없었다. 원래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특별한 시각으로 불화를 재해석한 작가가 있다. 이수경 작가는 ‘이동식 사원(2008)’이라는 병풍식 불화에서 모든 존상들의 뒷모습을 그렸다. 정교한 고려불화풍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한편으로는 익숙한 전통적인 화풍이면서도 뒷모습이라는 파격적인 시점에 놀라게 된다. 한편으로는 더 놀라야 되는데, 기묘하게 익숙하다는 점에 더 놀라는 것 같기도 하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옆으로 돌아앉은 부처님.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옆으로 돌아앉은 부처님.

언뜻 생각하기에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마주보고 있는 부처님이 아니라 등지고 앉아있다는 것은 우리를 떠난, 우리를 버린 부처님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등지고 앉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동식 사원’에서는 뒷모습만 봐도 우리에게 혹은 무엇인가에 화가 나서 뒤돌아 앉으셨다는 느낌은 없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모습인데 뒷모습이기만 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보아오던 부처님의 뒤에 와있다는 느낌만 받을 뿐이다. 뒤에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첫째는 예를 들어 연극을 객석에 앉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무대 뒤쪽에서 보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 가사를 의상디자이너인 내가 방금 입혀드려서 무대로 내보내드린 것 같다. 나는 그 연극을 관객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든 스태프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 관객과 배우의 관계보다는 스태프와 배우의 관계가 더 가깝게 동지의식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도 있다. 배우는 앞으로는 관객을 향해 꾸밈이 있는 연극을 하지만, 스테프에게는 진실한 원래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앞에서 보는 부처님은 연기를 하고 있는 부처님을 보는 것이지만, 뒤에서 보는 모습은 꾸밈없는 부처님 그 자체를 보는 것이다. 그 자체를 본다는 것이 불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다음으로 다가오는 의미는 원래 이렇게 뒤에서 바라보는 시점에는 누가 서있었나 하는 점이다. 법당에 걸리는 대표적인 불화인 ‘영산회상도’ 등을 보면 부처님 뒤편으로 일부의 보살, 천왕, 나한, 팔부중 등이 자리잡고 있다. 부처님의 협시보살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문수보살, 보현보살이나, 혹은 관음보살과 세지보살 같은 분들은 불단 앞쪽으로 나아가서 서계시지만, 8대보살의 나머지 보살들의 일부는 부처님 옆에, 일부는 부처님 뒤편에 서계신 형상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지금 부처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원래 불화 속의 보살, 나한, 천왕, 팔부중의 시각에서 부처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감독일까, 조명담당일까, 의상담당일까, 연출일까?
 

일본은행 소장 ‘아미타내영도’, 1296년. 고려.
일본은행 소장 ‘아미타내영도’, 1296년. 고려.

이수경의 ‘이동식 사원’은 늘상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불화를 깨달음에 한걸음 다가간 사람의 입장에서 그려진 불화로 재해석했다. 작품의 세부묘사는 전통기법을 따랐지만, 뒤돌아 앉아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완전히 다른 불화의 세계를 만들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면, 이수경 작가는 우리에게 부처님 뒤편에 앉을 권리를 주었다. 

만약 똑같은 시도를 조각으로 했다면 어땠을까? 이와 같은 신선함을 느끼기는 어려웠으리라. 왜냐하면 조각상인 불상은 원래부터 뒷모습이 있었다. 그러기에 원래 있던 것이지만 가려져 있던 것을 본다는 점에서 등지고 앉은 불상은 이처럼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화로서 뒤돌아 앉은 불상은 왜 이처럼 충격적일까?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중에 불화 속 부처님은 뒷모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부처님이라면 조각이나 불화나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착각이었다. 아무리 그림이라지만, 우리는 불화를 보면서 부처님 뒷모습은 없다고 으레 간주해왔던 것이다. 이것 역시 얼마나 2차원적인 생각이었던가.

이런 생각으로 부처님 뒤편에 앉고 보니, 참선을 하더라도 느낌이 다를 듯하다. 부처님과 마주보고 참선을 할 때는 부처님이 학교 선생님처럼 참선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 같다. 그러나 뒤편에 앉아서 참선하면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이 참선에 동참하시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작은 차이지만 우리 스스로를 높이고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게 하는 그림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미술관에서 전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대구의 청수선원(주지 효민 스님)에 엄연한 불화로서 걸리게 되었다.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 스스로가 깨달은 존재임을 일깨워주는데 있어 이만큼 효과적인 불화가 또 있을까 싶다. 그 의미를 이해하고 불화로서 받아들인 청수선원의 선택에도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유사한 시도는 전통불교미술에서도 보이기는 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부처님이 법당의 측면으로 돌아앉아 계시는 것이나, 금방이라도 우리를 떠날 것처럼 뒤돌아 서기 직전의 아미타내영도와 같은 작품들도 있었다. 이 역시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이제 완전히 돌아앉은 이수경 작가의 ‘이동식 사원’ 속 부처님은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하는 전기충격기처럼, 전통이라는 개념 아래 두근거리지 않는 미술로 굳어져가던 불교미술의 심장에 가해진 전기충격인 셈이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603호 / 2021년 10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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