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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진영선의 ‘해인사 판타지’ : 프레스코와 비디오 아트의 만남

기자명 주수완

전시실 가벽에 숨겨져 있던 ‘해인사 판타지’

백남준·진영선 작가가 2001년 함께 작업한 비디오와 벽화의 만남
길게 늘어선 12편 비디오 시간차로 송출하며 윤회와 깨달음 표현
해인사 역사를 공간으로 펼쳐 보인 프레스코 벽화와 조화 이뤄내

백남준·진영선 작, ‘해인사 판타지’. 2001년 완성.
백남준·진영선 작, ‘해인사 판타지’. 2001년 완성.

2020년말 해인사 성보박물관은 대대적인 내부공사를 진행하며 전시실의 가벽을 제거했는데, 안에서 뜻밖에 고 백남준(1932~2006) 선생의 비디오 설치 작품 ‘해인사 판타지’가 발견됐다. 

이 작품은 1998년 성보박물관 건립 당시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김석철(1943~2016)의 의뢰로 백남준 선생과 프레스코화 전문가인 진영선 교수가 함께 제작했으며, 2001년 완성됐다. 이후 대략 2010년까지 전시됐으나 ‘해인아트프로젝트’ 특별전을 위해 작품 앞에 가벽이 설치된 후 그만 잊혀진 존재가 됐다. 결국 10년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된 셈이었다. 

왜 이런 작품이 가벽 설치 후 그대로 묻히게 됐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박물관 측에서는 정비 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하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작품의 구성을 보면 우선 백남준이 담당한 부분은 12개의 비디오 채널 영상이다. 길게 나란히 늘어선 화면에서는 회전하는 법륜, 촛불, 팔만대장경 제작 과정, 만다라, 불두가 바닷물에 휩쓸리는 모습 등 영상과 함께 목탁 소리 및 불경을 암송하는 소리 등이 어우러져 마치 12개의 화면이 카논 변주곡처럼 유사한 내용을 시간차를 두고 윤회 하듯이 반복되는 내용이다. 그러다 이들 화면이 모두 동시에 같은 화면을 보여주는 순간도 있다고 하는데, 일종의 깨달음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보도에 의하면 브라운관은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며, 원래의 비디오 영상도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원작에는 널리 알려진 ‘TV붓다’가 영상 맞은편에 설치되는 것이었으나, 어떤 이유인지 설치되지 못하고 김석철 선생이 일단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재 그의 작고와 함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추정컨대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디오 영상의 색상은 마치 디지털화된 단청처럼 보였을 것 같다. 단청의 문양들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 같은 형상이나 혹은 가운데에서 밖으로 확산되는 듯한 운동감을 보이는데, 백남준은 이것을 디지털로 변환해 실제 움직이는 단청을 의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단청의 오방색이 마치 수·금·지·화·목 같은 세계의 구성요소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영상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둘러싼 세계를 함축해 나타내고 있으니 그야말로 움직이는 디지털 오방색 단청이라 할만하다. 맞은편에 ‘TV붓다’가 설치되어 있었다면 성보박물관은 그대로 디지털 법당이었을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이 불상과 법당 건축을 구성한다면, 이 전체를 아우르는 진영선의 벽화는 사찰을 감싸고 있는 가야산의 숲과 시간을 구성한다고 하겠다. 특히 첨단의 비디오 아트와 가장 전통적인 프레스코 벽화의 조화는 마치 과거의 인쇄술인 팔만대장경과 이를 디지털화하여 웹상에서 제공하고 있는 현대의 경전 제공방식으로 신·구의 조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벽화의 주요 모티프를 보면 백남준의 비디오 영상 위로 강화도에서 해인사에 이르기까지의 산하가 펼쳐진다.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남해에서 조성되어 강화도로 이운되고, 다시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강화에서 나와 이곳 해인사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적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넓게 펼쳐진 산하의 공간적 형태로 변환해 담아냈다. 

그리고 이렇게 펼쳐진 산하에 팔만대장경판과 이들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내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한편으로는 화면 오른쪽의 장경판전 서가에서 경판을 하나하나 꺼내 가운데로 옮겨와서 펼쳐보는 것 같은 구도로 묘사되었고, 그 아래에 다시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이 상영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그 경판의 내용을 비디오로 보여주는 것처럼 벽화와 비디오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벽화의 가장 오른쪽 끝에서는 이 경판에 찍힌 글자들이 마르기 전에 한 방향으로 닦아낸 것처럼 몇 가닥의 선으로 길게 쓸려 있다. 이것은 나름대로 진영선 작가의 백남준에 대한 오마쥬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브라운관의 주사선을 보는 듯 변형된 팔만대장경판.
브라운관의 주사선을 보는 듯 변형된 팔만대장경판.

이렇게 한쪽으로 쓸어낸 듯한 경판은 마치 브라운관의 주사선을 암시한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경판의 글자 하나하나가 브라운관의 주사선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어쩌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가지고 있는 파격적·현대적 예술정신을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칭송한 것이 아니었을까.

더불어 비디오 아래에는 별도로 6점의 패널화가 배열되었는데, 순서대로 보면 숲속의 나무에서 시작해 경판의 재료인 목판으로 가공되고, 이어 경전을 새기는 과정, 경판의 완성, 경전을 찍어내는 인경, 경전으로 완성된 책들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묘사했다. 이렇게 구분된 그림들은 위에 자리한 각각의 브라운관들과 대비를 이룬다. 

어쩌면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몇 장면으로 나누어 그리는 방식은 ‘팔상도’처럼 불교에서는 아주 고전적인 방법이다. 팔상도가 석가모니의 탄생에서 열반까지의 일대기를 다룬 것이라면, 진영선의 패널화는 대장경의 탄생과 경전으로 인쇄되어 읽히기까지의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나 이러한 방식이 백남준의 비디오 패널들과 만났을 때는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 결국 전통적인 이야기 서술 방식은 과거의 비디오 아트였고, 비디오 아트는 이 시대의 팔상도라는 개념을 확연히 각인시켜준다.
 

 ‘해인사 판타지’의 영상이 가동되었을 때의 모습.
‘해인사 판타지’의 영상이 가동되었을 때의 모습.

한편 거대한 전시실 천장에는 마치 텅빈 공간에 블랙홀처럼 거대한 구멍이 열린 것 같은 천장화가 그려졌다. 별들이 이 구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데, 저 공간 너머에는 또다른 푸른 공간이 엿보인다. 밤하늘의 블루와 바다의 블루가 서로 대응하는 듯하다. 
이로서 해인(海印), 즉 바다에 비친 하늘의 모습이 완성된다. 블랙홀 너머로 마치 백남준과 진영선의 ‘해인사 판타지’가 그대로 비춰서 또 하나의 ‘해인사 판타지’가 펼쳐질 것 같다. 그 자체가 판타지인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 이 벽화는 위에 흰 칠이 덧칠되어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당시 백남준은 뇌졸중 이후 투병 중이어서 해인사에 직접 방문할 상황이 안됐기 때문에 진영선 교수가 직접 뉴욕을 오가며 함께 작품구상을 이어나갔다. 진영선 교수에 의하면 백남준은 해인사에 자신의 작품이 설치된다는 것에 크게 기뻐하며 열성적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실제로 백남준의 작품이 사찰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만큼, ‘해인사 판타지’가 원래의 의도대로 복원되어 다시 빛 볼 날을 기대한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91호 / 2021년 6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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