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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호신의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

기자명 주수완

지리산 시공간에 연기적 사유 담아낸 ‘마인드 맵’

실상사 철조 불상은 정형화된 비례·조화 깬 투박한 모습
뒤편 봉안된 지리산 불화의 파격성과 완전한 조화 이뤄
불화·광배 대신한 소나무가 법당을 한국의 보드가야로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 이호신 그림. 실상사 약사전. 2015년. 사진 오른쪽의 실상사는 연꽃 위에 올라간 모습이 마치 연화장세계를 보는 듯하다.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 이호신 그림. 실상사 약사전. 2015년. 사진 오른쪽의 실상사는 연꽃 위에 올라간 모습이 마치 연화장세계를 보는 듯하다.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  중 실상사 부분. 연꽃 위에 올라간 모습이 마치 연화장세계를 보는 듯하다.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  중 실상사 부분. 연꽃 위에 올라간 모습이 마치 연화장세계를 보는 듯하다.

지난 연재에서 광배가 불상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렇다고 해서 후불탱화가 잘못된 법식이라든가, 그것을 앞으로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것은 아니다. 이 법식 역시 이미 오래돼 전통으로 자리잡았고, 조선불교미술의 특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광배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런 법식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조선시대의 그 아름다운 후불탱화를 볼 수 있을 것인가. 다만 후불탱화와 광배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해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실상사 후불탱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실상사 약사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선종구산이 확립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그로테스크한 미감을 대표하는 불상 중의 하나이다. 석굴암에서 정점을 보여준 통일신라의 고전적 미감을 다시금 해체하여 그 정형화된 비례와 조화를 깨뜨리고 다양한 시험과 모색을 보여주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선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점을 제외하면 역사에서는 항상 암울한 시대, 강력한 신라왕권이 쇠퇴하고 호족이 득세하여 나라가 분열되던 어지러운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지방에서 서툰 장인들이 이러한 다소 투박한 불상을 만들었던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호족의 득세는 과연 부정적인 현상일까? 아마도 그것은 신라왕실만의 시각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경주 중심으로만 돌아가던 판국에 어떤 인물이 나타나 우리도 잘 살아보자며 지금으로 말하자면 지역개발, 균형개발을 주장하며 지방의 힘을 키운다면, 당시 그 지역에 살았던 백성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환영할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적인, 나아가 자생적인 행보에 어울리는 미술이 바로 전통에서 벗어난, 즉 파격의 미학을 보여주는 실상사 철조여래좌상과 같은 양식이었을 것이다. 이런 미감을 만들어내고, 이런 미감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당시 남원의 조각가와 사부대중의 과감한 시도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아마도 원래는 지금보다 더 큰 법당에 이 철조부처님이 모셔졌을 것이다. 지금도 약사전과 보광전 주변의 넓은 기단과 기둥자리를 통해 원래의 법당터가 더 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큰 법당에 맞춰 거대한 광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법당은 그만한 규모가 되지 않기 때문에 광배를 설치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후불탱화를 둘 수도 없다. 후불탱화를 걸어도 거대한 철조부처님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한때 후불탱화가 걸려있었지만, 사실상 사천왕과 제자상 일부 외에는 보이지 않는 불화였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부처님만 법당에 모셔진 상태로 지내왔다.

그러다 지난 연재에 소개한 ‘지리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약사전에 새로운 후불탱화가 모셔지게 됐다. 엄밀히 말하면 후불탱화는 불단의 부처님 바로 뒤에 걸리는 불화인데, 이 불화는 불단 위가 아니라 불단 뒤 벽에 걸리기 때문에 기존의 후불탱화와는 개념이 다르다. 그래서 이 작품을 그린 이호신 화백도 ‘뒤편 불화’라 풀어서 명명한 듯하다. 

실상사 약사전 철조여래좌상 및 후불탱화.
실상사 약사전 철조여래좌상 및 후불탱화.

파격적인 불상에 파격적인 불화가 어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전통이란 모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파격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기에, 실상사의 파격적인 불화는 사실 실상사 철조 부처님 입장에서는 가장 전통적인 불화인 셈이다. 또한 법당 안에서 원래 부처님 주변을 오른쪽으로 도는 우요의식이 중요했고, 돌면서 사방 벽면의 벽화에 참배하는 의례가 있었음을 참조한다면, 이 불화는 매우 오랜 전통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다만 전통적인 후불탱화에는 부처님 주변으로 보살과 성문제자, 그리고 호위신중이라고 하는 사천왕, 팔부중이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여기에는 그런 전통적인 존상들이 등장하지 않아 의아하다. 이것을 불화라고 불러야할까? 대신 지리산 풍광이 펼쳐진다. 그중 가장 중심에는 광배를 대신하듯 큰 소나무 한그루가 자리잡았다. 마치 부처님이 보드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듯이 광배도, 불화도 아닌 소나무를 그려 순식간에 이곳을 우리들만의 깨달음의 장소로 만들었다.

그 주변에 본격적으로 지리산 지도가 펼쳐진다. 실상사도 보이고, 연곡사도 보이고, 화엄사도 보인다. 절 뿐만 아니라 황학동도, 화개장터도 보인다. 지리산 반달곰도 보이고 산장이며, 천왕봉이며 그 모든 것이 이 그림 안에 담겼다. 나아가 지리산 마고할멈과 하늘에 떠있는 실상사의 승탑도 보인다. 

비록 전통적인 방식으로 화면의 중앙에 모셔진 것은 아니지만, 이 그림에도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 그려져 있다. 정면에 볼 때 가려지지 않도록 한쪽으로 치우쳐 그려진 점이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그 주변으로는 보살이나 나한, 천왕이 호위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존상들이 보이지 않아 불화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보살과 성문과 천왕들은 모두 누구인가? 남원에서는, 지리산에서는 이곳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보살이고, 이곳 절의 스님들이 성문이고, 또한 각각의 절에 보시하는 많은 불자들이 절을 지키는 천왕이다. 실상사 부처님을 에워싸고 이곳에 불교가 터를 잡은 역사가 이 그림 속에 담겨 있다. 마치 실상사 철조 부처님이 850년 무렵 조성된 뒤 천년이 넘게 보아온 남원 일대의 역사가 부처님 안에 축적되어 있다가 법당 사방으로 프로젝션 되는 듯한 신비로움이 법당을 감돈다.

경주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자신들이 사는 곳 남원을 중심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만든 철조여래좌상과 다른 사람이 부처님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 부처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선불교, 그리고 이제 지리산을 통해 불국토를 보고 싶었던 이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이 지리산의 시간적 공간적 지도라고 할 수 있는 불화는 모든 것이 연기(緣起)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부처님의 생각을 시각화한 마인드맵 그래픽 같다. 이론적인 ‘리(理)’ 뿐 아니라 실제적인 ‘사(事)’까지 걸림없이 이어질 때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실제 모습인 ‘실상(實相)’을 표현한 이 불화가 실상사에 걸려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99호 / 2021년 9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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