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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안성금의 ‘부처의 소리’

기자명 주수완

반으로 갈라진 부처님으로 표현한 불심

해인사 성보박물관 앞뜰에 전시된 찢어진 두 불상과 텅빈 공간
사찰 찾은 불자들 비어있는 부처님 공간에 참선하듯 앉아 촬영
둘로 갈라진 게 아니라 차원에 걸쳐 떨어져 보인다는 의도 담아

안성금, ‘부처의 소리’, 해인사.
안성금, ‘부처의 소리’, 해인사.

현대미술로서의 불교미술은 다양한 실험을 하지만, 자칫 그러한 시도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특히 불상이란 매우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불상을 현대적으로 변형하거나 왜곡해서 표현하는 것은 불교적 입장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결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위험한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여주는 강한 메시지 덕분에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안성금 작가의 ‘부처의 소리’가 그렇다. 이 작품들에서는 불상이 온전히 전시되지 않고 반으로 잘려서 전시된다는 점에서 다소 충격일 수 있다. 불교미술에서 이처럼 불상을 자르거나 해체하는 것은 사실 매우 금기시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성금 작가의 이러한 해체는 해인사에서 추진해온 ‘해인아트프로젝트’에 출품되었던 것이고 현재도 해인사 성보박물관 앞 뜰에 전시되고 있다. 불상을 가르고 찢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작품에 대한 대체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불상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면, 결국 그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 정도로 볼 수 있다. 현재는 찢어진 두 불상 사이가 비어 있지만, 사실 그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에 찾아보면 실제 이 두 갈라진 불상 사이의 공간에 참선하듯이 앉아있는 사람의 사진도 눈에 띈다(해인사는 그 안에 탑이 들어오도록 배치했다). 안성금 작가 역시 출가를 심각하게 고려했을만큼 불심을 가진 작가이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을 작품 안에 담아보고자 한다는 의도를 밝힌 바도 있다. 

그런데 불상을 반으로 쪼갰음에도 이것이 성상 파괴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사진에서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지만, 실제 작품을 보면 불상이 둘로 갈라져 있다는 느낌보다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마치 공간 자체가 반으로 나뉜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시 말해 손을 물에 담그면 손은 잘린 것이 아니지만 물 밖의 손과 물 안의 손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부처의 소리’ 속 불상은 불상이 반으로 갈린 것이 아니라, 아직 하나의 몸인데 두 차원에 걸쳐 있어서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정교하게 둘로 나뉨으로써 마치 거울에 반쪽이 반사된 듯한 효과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치 마술사가 사람 몸을 반으로 가르는 마술을 펼쳐보이는 것과도 비슷하다. 실제 둘로 나뉘면 죽음이지만, 마술사는 몸이 나뉜 것이 아니라 두 몸이 다른 차원에 걸쳐 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렇게 공간이 나뉜 것이고 불상이 나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오히려 불상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공간이 마치 어긋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반쪽의 두 불상 사이의 공간은 마치 차원과 차원을 넘나드는 구멍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불상이라는 불교적 소재를 사용하면서 불상 안의 나 자신을 찾으라고 하는 것 같은 불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필자에게는 공간에 대한 실험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러나 그 공간에 대한 실험 역시 불교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평행우주 이론에서는 이 세상에 방금 오른쪽으로 향한 ‘나’가 있다면, 우주 어딘가에는 왼쪽으로 향한 다른 가능태로서의 ‘나’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데, 마치 이 평행우주 속의 대칭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평행우주 개념의 관점은 불교적인 우주관하고도 유사하다고 한다. 안성금 작가의 거울 반사와도 같은 이러한 대칭성이 단순한 공간적 유희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쿄토 사이오지(西往寺) 목조 보지화상입상, 12세기경, 쿄토국립박물관.
쿄토 사이오지(西往寺) 목조 보지화상입상, 12세기경, 쿄토국립박물관.

사실 이렇게 둘로 갈라지는 가운데 본질을 드러낸다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가는 안성금 작가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수백년 전인 12세기에 일본의 한 조각가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신비로운 승려 보지화상(寶誌, 418~514)을 묘사하면서 승려 혹은 보살의 얼굴이 둘로 갈라지는 가운데, 그 안에 숨겨진 십일면관음의 얼 굴이 드러나는 파격적인 표현을 한 바 있다.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얼굴의 이마에 이제 막 십일면의 얼굴 중 일부가 드러나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자기 안의 부처가 막 발견되어 현현하는 특별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반으로 갈리는 부처의 개념은 두 불상이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안성금의 작품에서는 그 중앙의 공간을 비워놓음으로써, 그리고 얼굴이 갈라지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공간 자체를 반으로 갈라놓아 공간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자아를 드러낸다’의 개념을 너머서 있는 것이다. 더불어 오히려 부처 안에 내가 있다고 한 것이니 방향성도 반대이다.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병좌상, 통일신라시대.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병좌상, 통일신라시대.

그런 의미에서 해인사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쌍둥이 비로자나불상도 이러한 대칭성을 통해 평행한 두 차원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오히려 쌍둥이 비로자나부처님은 온전한 두 부처님으로 이 대칭성을 표현하여 둘이 분명히 나뉘고 있는 개념을 보여주지만, 안성금의 불상은 나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라는 사실을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마침 쌍둥이 비로자나부처님이 전하는 해인사에서 이러한 작품을 전시하다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불상과 비로전 불상이 함께 놓이는 일은 없겠지만 함께 놓이는 공간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항상 함께 묶어서 생각될 수 있도록 안내된다면 해인프로젝트의 의미가 더욱 빛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두 불상 사이에 굳이 ‘나’가 들어가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 안성금의 ‘부처의 소리’는 나 자신을 그 가운데에 놓아두라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반쪽 중의 어느 한쪽이 내가 진짜고 반대편은 반사된 것이라고 하고, 또 반대쪽은 자신이 진짜고 저쪽이 반사된 것이라고 하는 동안 무엇이 진짜 나이고 무엇이 가짜 나인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지 하는 생각을 그 깊은 두 반쪽 불상 사이의 공간으로 빨려들어가며 하게 된다. 어차피 알고나면 ‘나’ 역시 저렇게 텅 빈 공간이 아닐까. 다만 무한히 텅 빈 공간이기를 바랄 뿐이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607호 / 2021년 11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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