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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스님 행장과 선풍-중도사상 바탕으로 한 참선 정진 강조

기자명 이학종
경허-만공-보월-금오 선맥 계승 대표적 선승
출가 이후 '이뭣고'화두 참구 불국사에 선운 개원

6일 입적한 불국사 조실 성림당(聖林堂) 월산(月山) 큰스님은 경허(鏡虛)-만공(滿空)-보월(寶月)-금오(金烏)로 이어지는 선맥(禪脈)을 계승한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이다. 출가 이후 전국 제방선원을 다니며 줄곳 `이뭣고' 화두를 참구해온 월산(月山) 스님은 특히 1974년 관광사찰에머물러 있던 불국사에 선원(禪院)을 개원함으로써 관광지로 전락한 채 선맥이 끊겼던 경주에 선불교(禪佛敎)의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스님은 토함산 서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이 불국선원에서 쇠락해가는 한국선불교의 전통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제자들에게 그 맥을 전수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만공 스님에게서 받은 `이뭣고' 화두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간직해온스님의 선풍은 예산 수덕사 덕숭산 자락에 울려 퍼지며 선종사(禪宗史)에 새지평을 열었다.

월산 큰스님은 당대의 선승답게 특이한 선풍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에 큰영향을 끼쳤다. 평소 “내 사상은 참선뿐. 이것 만큼은 죽을 때까지 할거야.”라고 말해왔던 스님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깨달음의 길에 도달할 수 있으며 선이란 해탈과 자재(自在)를 여는 요체라는 법문을 내리곤 했다.

스님은 또 “일체를 초월해서 일체를 여의지 않는다”는 중도관(中道觀)을 펼쳐보였으며 제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자기의 본래 마음자리부터 찾으라고 가르쳐왔다. 스님은 한때 불교계를 뒤흔들었던 돈점(頓漸) 논쟁에 대해서는 초연한 입장을 견지했다. 순천 송광사와 합천 해인사가 깨달음에 대해돈오점수 돈오돈수(頓悟漸修, 頓悟頓修)를 놓고 설전을 벌일 때에도 “돈오돈수면 어떻고 점수면 또 어떤가. 그것은 결국 한 가지인 것을. 누가 내게와서 어느게 옳으냐고 하면 나는 그런 거 모른다고 할거야. 다들 부질없는짓이지.” 라며 독특한 가풍을 고수했다.

후학들에겐 늘 중도(中道)사상을 강조하며 때로는 추상같고 때로는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 독특한 덕숭선맥을 잇는 선승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아왔다. 매사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하되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한 스님이었다. 스님의 사상은 중도사상이 기저가 되었고 그 사상이 일반에게는 참선정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깨닫기 위해서는 참선을 해야하고 참선을 해서 깨달으면 부처님의 뜻도역대선지식의 가르침도 모두 알아진다”고 강조, 언제나 참선을 강조해온스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만법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초월해서 다가지는, 즉 시공간을 초월해서 시공간을 버리지 않는 것”,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결국 한가지'라고 정리하는 등 법에 관해서도 산뜻하게 정리하는 면모를 보였다.

스님은 지난 89년 법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불교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안동소주가 40도이다”라는 기상천외의 답을 해 당시 법을 구하는많은 선남선녀들에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투출삼계 불사일법(透出三界 不捨一法)' 즉 삼계를 통과하되 그 가운데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는 중도관(中道觀)을 보였던 큰스님은 불국선원에서 용맹정진에 들었던 지난 91년에도 법보신문과의 인터뷰 도중 현재 스님의 경계를 묻는 질문에 “월산의 뱃 속에서 폭탄이 터진다 해도 월산의 배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일갈, 극도로 혼탁했던 시대를 살던 당시의 불자들에게 한여름밤의 얼음비같은 청량음을 들려주기도 했다.

월산 큰스님은 덕숭문중의 가풍을 안빈낙도(安貧樂道), 즉 `가난함을 즐기고 도에 즐거움을 붙이는 것'이고, 자신의 가풍을 `하루 세 끼 밥 먹고잠오면 잠자는 것'이라고 밝히는 등 역대 선지식들이 그랬던 것처럼 `평상심시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삶으로 평생을 일관했다. 그러나 스님은이처럼 참선을 중시하면서도 다른 선사들과는 달리 `다소 돌아가는 것일 뿐이지 경을 공부하는 것으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유연한 입장을 보이는 등 어느 한 곳에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삶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

종단이 혼란과 위기에 처했던 정화나 개혁 당시와 같이 종단이 난국에 처했을 때는 현실에 적극 나서 난국을 헤쳐나가는 길을 제시했는가 하면, 총무원장을 맡고난 후 한 두 달만에 `이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라며 홀연히 자리를 버리고 떠나는 무착의 삶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방에서 참선정진에 전념하는 것으로 일관한 스님의 삶은 중도로 점철된중도의 삶 그 자체였다. 특히 스님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법을 청하는 후학과 신도들을 외면하지 않고 거동의 불편함을 잊은 채 법의를 수하고 법을설하시는 등 대선사·대선지식으로서 한 치의 소홀함도 없는 일생을 보여준후 지난 6일 홀연히 중생의 곁을 떠나갔다.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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