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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향기 - 각성 스님

기자명 채한기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변명 다하고 언제 공부해 위법망구 정신으로 해야지"

교학 연구 40년…'적통강맥' 잇는 대강백
후학양성 위해 헌신…재가자 위한 강의도 열성

강맥(講脈)을 이어가고 있는 강사 중 최고의 강백 중 한 분으로 각성 스님(부산 화장산 화엄사 주지)을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없다. 지난 40여 년간 출·재가자를 상대로 화엄경, 능엄경 등을 강의해온 스님은 종단에서 3대강백 7대강사의 맥을 그대로 잇는 '적통강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스님이다. 최근에는 통화총서 제4집인 《불조직지심체요절》(현음사)을 내놓으며 왕성한 저술 활동까지 보이고 있다. 법문을 위해 잠시 상경한 틈을 타 조계사에서 만난 스님은 6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젊었다.

17세 출가해 23세에 강주를 맡은 초고속 '성장(?)'. 당대의 강백이었던 탄허, 운허 스님 등이 각성이라는 인물을 어느 정도로 평가했는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젊은 시절부터 교학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낸 스님의 출가 동기는 독특하다. 어려서부터 깊게 맺어진 불연(佛緣)이나, 인생에 대한 회의감 등이 대개의 출가 동기이지만, 각성 스님은 《5천년 조선 역사》라는 책을 접하고 출가를 결심했으니 별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이율곡 선생이 절에 들어가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접한 순간 절에 들어가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는 것. 처음으로 찾아간 절은 백암산 백양사였지만 며칠만에 나왔고, 1년 후 해인사로 출가해 사문의 길로 접어들었다.

출가 직후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강백을 찾아 나설 만큼 스님의 공부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다. 해인사에 주석했던 운허 스님은 물론 고봉, 관응, 성능, 탄허 스님등 당시 최고 강백이라는 평판을 얻은 큰스님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그때는 눈밝은 선지식이나 이름난 강백이 강단에 서면 전국에서 납자들이 모여 들었지요. 나도 마찬가지야. 해인사, 범어사, 월정사. 동화사 등 대 강백이 강단에 오른다는 소식만 들으면 달려갔었습니다."

19살 되던 해 범어사 고봉 스님을 찾아가 능엄경을 배웠는가 하면, 1년 후 범어사에서 돌아온 스님은 다시 해인사 운허 스님 밑에서 기신론을 청강하고 그해 늦가을에 동화사로 발길을 옮겨 관응 스님으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2년동안 범어사, 불국사, 해인사, 동화사 등 본사만도 5개 사찰을 찾은 것.

"당시는 정화 직후라 전국의 사찰 분위기가 어수선했어요. 어디 한 사찰에서도 마음놓고 공부하기가 어려웠지. 그러니 한 스님으로부터 한 과목을 끝까지 청강하기는 어려웠지.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 할 수는 없잖아요. 이런저런 변명 다하고는 공부할 수 없어요. 더구나 출가한 스님이라면 … 어느 정도 강의를 듣고 나면 독학을 했지요. 전깃불도 없었을 때라서 해 있을 때 부지런히 하고 해 떨어지면 호롱불 키고 공부했고."

그렇게 대강백을 찾아 떠돌며 공부했기 때문에 다양한 강론을 들을 수 있었고, 교학의 전반을 섭렵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당시 출중한 여러 강백이 있었지만 스님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 강백은 탄허, 운허, 관응, 성능, 고봉 스님 등 다섯 분. 큰스님들은 모두 한결같이 스님을 두고 '큰 그릇이 될 인물'이라고 평했다고. 운허 스님으로부터는 교학에 쓰이는 어휘 개념을 배웠다. 교학 연구의 핵심을 전수 받은 셈. 관응 스님으로부터는 화택종지를 배우고 탄허 스님으로부터는 동양학 전반을 배웠다. 스님은 지금도 탄허 스님을 처음 만나 청강했던 날의 감회를 잊지 못한다. "탄허 스님이 강원도 종무원장 겸 월정사 주지로 계실 때입니다. 전국의 수재란 수재는 다 모아 놓고 강의를 하며 직접 지도까지 하셨어요. 그 때 스님 세납이 45세일 때인데 강단에 섰을 때는 패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어. 강의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후학을 위한 열정이었을 겁니다. 동양학의 대가요 유불선의 삼교와 제자백가에 능통하신 분의 강의였으니 명강의였지요. 그 때 그 강의를 듣지 못했으면 땅을 치고 울었을 거라. 지금 생각해도 천만다행이지요."

전국의 강백을 찾아 청강하고 독학하기를 5년. 스님은 출가한 지 5년 만인 세납 23세 때 강원 강단에 섰다. 처음으로 강단에 선 것은 은해사. 그곳에서만 5년간 머물며 후학을 양성했다.
"그 때 그 절은 지극히 가난했어요. 어쩌다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을 때는 모두들 좋아라 했지. 모든 학인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고된 논·밭일까지 하며 공부해야 했습니다. 위법망구 정신이 없었더라면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나도 그 덕분(?)에 치질과 폐병을 얻었지요. 그 병은 6년 후에나 치유됐어. 고생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공부할 수 있고 공부 하려는 스님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스님의 교학 연구는 한 권 두 권 책으로도 발간됐다. 67년 《입능가경》 10권을 비롯해 《대승기신론주해》, 《대도직지》 《불조직지심체요절》 《관불삼매해》 등 수십 권의 저술을 이미 남겼다. 스님이 탄허 스님의 화엄학 계보를 잇는 대가로 평판이 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70년, 탄허 스님이 번역한 《화엄경론》120권 증의(證義)를 맡으면서부터. 화엄학의 대가 탄허 스님이 번역한 원고를 30대 초반의 강사가 검토하며 틀린 곳을 바로 잡았으니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전국 어디서든 강의를 부탁 받으면 지체없이 달려가는 소신을 고수하고 있다. "강백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았으니 후학이 찾는다면 어디든지 달려가야지요." 해인사 승가대학장을 비롯해 백양사, 통도사, 은해사, 범어사 강원을 찾아 후학 양성에 매진해 온 스님은 82년 겨울 금산사에서 화엄학림을 개설해 또 한 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강원 졸업생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리는 교육제도가 없었던 당시 스님은 3년동안 화엄학을 강의했다. 개혁종단 이후 교육제도의 하나로 자리잡은 전문학림의 토대가 이 때 마련된 것이다.

스님은 일반인을 위한 강의에도 열성이다. 서울 삼일선원과 부산 화엄회관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지금까지 10여년 간 강의해 오고 있다. 공부에 승속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 "불법이 어디 스님들 만의 것인가. 경치 좋은 산사만 찾지 말고 경전 속 어귀에도 귀를 귀울여야 해요."

스님은 지금 조계종이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는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한다. "물론 선 수행이 중요하지. 그러나 처음부터 교를 버리고 선을 하라는 것이 아니예요. 교학을 이처럼 인식하지 않으니 누가 교학 연구를 하려 하겠습니까. 이러다간 강원에 남는 학인이 한 명도 없을까 겁이 나요. 또 학문을 무슨 일회용 식품이라 생각하는지 금방 배우고 금방 끝내려고 하는 풍토도 문제지요. 요즘 공부하기가 얼마나 좋습니까. 대강백들이 펼쳐놓은 책이 있으니 공부하기가 좀 수월한가. 지금 학인들 어렵다 말고 정진해야 해. 변명 다 하고 언제 공부하나. 공부는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해야하는 것입니다."


채한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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