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교사 속의 가족불교상

기자명 법보신문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재가에 머물며 정진 계속 온 가족 성도·출가 이루기도

중인도 바라나시의 장자이자 세티의 아들 야사는 인생의 무상함을 통감하고 세존에게 와서 교화를 받고 불제자가 되었다. 그의 부모와 아내는 야사의 출가함을 슬피여겨 세존이 있는데까지 따라왔다가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불교에 귀의했다. 이들이 부처님 성도 후 첫 우바새, 우바이이다.

중국의 방거사(龐居士)
중국의 선종은 대대로 이름있는 거사를 적지않게 배출해 냈으나 그중에서도 특출한 이가 방거사다. 유마의 화신이니, 보처대사(補處大士)니 하는 평을 들을 만큼 선종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신통과 묘용은 물을나르고 장작을 쪼개는 일'이라는 주장은 일상생활의 불교관을 가장 잘 표현한 말로 후세에 즐겨 인용된다.

방거사의 가족 또한 선수행에서 방거사 못지않은 경지를 이루었다. 하루는 단하 천연선사가 방거사를 찾았는데 문 앞 샘가에 앉아서 캐온 나물을 다듬고 있는 방거사의 딸 영조(靈照)를 보고 `아버님이 계시느냐'고물었다. 그러자 영조는 나물바구니를 놓고 두손을 모아 차수(叉手)하고 섰다. 단하가 다시 묻자 이번에는 바구니를 들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단하가 문득 돌아서 나가려는데 밖에서 방거사가 돌아왔다. 뒤에 영조가 아버지에게 단하가 왔다 간 사실을 이야기하자 거사가 딸에게 물었다. “단하스님은 계시냐”. 영조는 “단하스님은 이미 떠나셨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방거사가 “적토우(赤土牛)가 낮잠을 잤구먼”하고 말했다.

신라시대의 부설거사

어려서 불국사에서 출가하여 계(戒)와 정(定)이 높고 식견이 예민했다.

영조와 영희 등 두 도반과 함께 두륜산 등지서 10여년 정진한 뒤, 오대산문수도량을 참배하러 가던 중 두릉(지금의 전북 만경) 구무원(仇無 )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딸 묘화와 인연이 되어 결혼했다. 도반들은 그의 파계를비난하며 떠났지만 그는 재가에 머물며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을 낳고서도 보살의 실천행으로 정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두 도반보다 먼조 성도를 이루었다. 부설거사가 입적한 뒤 등운과 월명도 출가하여 도를 깨우쳤다.

묘화는 110세까지 살다가 죽기 직전에 집을 보시하여 절을 만들었다.

(참고문헌 《선사신론》(우리출판사), 《한국불교인명사전》(불교시대사), 《불교사전》(동국역경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