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세상 온다" 석불배꼽꺼내

기자명 서동석
조선왕조가 말기적 증세를 보이는 징후는 무엇보다 민중의 삶을 도탄에빠지게 한 봉건체제의 부패였다. 계급사회를 받쳐주는 형식이었던 과거제도는 진작부터 공정한 시행이 자취를 감추었고 공공연하게 뒷거래를 통한매관매직이 기승을 부렸다. 중앙의 웬만한 자리는 뇌물로 거래되기 일쑤였다.

지방의 조그만 고을의 벼슬까지 자리값을 주고 부임을 했으니 그 댓가를치루기 위해서는 애꿎은 민중만 피를 말려야 했다. 누군가 자신이 지불한자리값 보다 더 두둑히 치루는 사람이 오기 전에 상납한 뇌물의 벌충을 확실히해야 했다.

이미 죽은 사람까지 들먹여 세금을 뜯어가는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시달리는 민중들에게 한가닥 실날같은 희망은 새로운 세상의 도래였다. 계급으로부터의 해방, 억압과 수탈이 없는 평등사회, 착취자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지는 새세상, 이것이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민중의 꿈이다.

억압이 있는 곳에 반발은 필연이다. 봉건왕조의 부패상이 심해질 수록자연 발생적인 민란의 횟수는 비례하여 늘어났다. 특히 가렴주구가 심했던삼남일대에서의 민란은 빈번했고 그 강도와 대중의 참여가 높아갔으며 조직된 대중의 힘으로 발전하여 갔다. 게다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의 체결이후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한 외세가 조선에 침투하여 제국주의적 수탈이강화되어가자민중의 주체적 의식이 고양될 수 밖에 없었다. 즉, 혁명의 발생에 필요한 주.객관적 조건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동학사상이 짧은 기간 안에 민중 속으로 퍼져간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무릇`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선언은 계급적 신분에 의해 죽도록 노동을 하고도 생산물의 태반을 양반에게 뜯겨야 하는 민중에게 그야말로 갈증을 풀어주는 `남천감로'였다. 아울러 이내 후천개벽이 되어 새세상이 올 것이다는 가르침은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에게 무엇보다 힘이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선운사 마애석불 비결'사건이 일어난다. 갑오농민전쟁이본격화되기 이태전의 일이니 1892년의 8월에 일어났다.

지금은 전북 고창군 아산면에 있는 조계종 제24교구의 본사인 선운사의뒷산에는 도솔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이 산의 이름이 도솔산인 만큼 대번에미륵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도솔암의 서쪽에는 높이가 50여 척이나 되는 거대한 층암절벽이 솟아 있는데, 이 절벽의 암석 전면에 투박한 모양의
미륵이 새겨져 있다.

그동안 전북 유형문화재 제30호였다가 최근에 보물 제1200호로 지정된 이미륵을 흔히 `선운사 마애석불'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마애석불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하나 숨겨져 왔는데,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설화가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부터 전해 내려왔다.그러나 그 비결을 함부로 꺼내려 했다가는 벼락에 맞게 된다는 경고도 함께있었다.

즉 비결만 무사히 꺼낸다면 봉건왕조의 상징인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니학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하루 빨리 누군가 진인이 나타나 그것을 실현시켜주길 간절히 바랐다. 반면에 왕조를 지키려는 수구세력은 비결이 탈취되지 않도록 혈안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임진년 8월. 고창, 무장, 정읍 등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있던 손화중 접주의 집에 모인 동학의 지도자 오하영, 강경중 등은선운사마애석불의 배꼽에 있는 비결을 꺼내기로 작정한다.

도솔암에 오르는 산비탈길의 부근에는 남녘땅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듯이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높은 절벽의 중간 쯤에 미륵불의 배꼽이있으므로 손화중을 위시한 3백 명의 농민은 청죽 수백개와 새끼 수십 타래로 사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도끼로 석불의 배꼽을 부수어 비결을 꺼냈다.

그 비결에 무엇이 써졌는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손화중은 잠적했다고 한다.

선운사의 미륵은 창건주인 검단선사가 입적하면서 암벽에 모습을 나타낸것이라고 전한다. 검단선사는 절을 세우려고 이곳에 들어왔을 때, 이곳에는도둑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선사는 도둑들에게 소금 굽는 방법과 종이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어 그들을 구제하였다.

현재 도솔암 주지로 있는 정일스님은 절에서 얼마 안떨어진 바닷가, 해리라는 고을이 바로 소금을 굽던 곳이라 한다. 검단선사는 도둑과 천민에게따뜻한 생활을 꾸릴 수 있도록 방법을 가르쳐 준, 말하자면 `미륵'이었다.그래서 그가 입적한 후에도 그를 기리는 마음은 간절했다. 민중의 신앙대상으로까지 승화된 스님의 모습이 어느 때부터인가 암벽에 새겨졌고, 먼 훗날그 석불에는 당래하생불로서의 미륵불이 계시하는 비결이 숨겨져 있다는 설화로 발전하였다.

갑오년의 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외피를 썼지만 그 동력이 된 사상은 민중을 구원하러 도솔천에서 내려온다는 미륵신앙에 두고 있다. 즉 말법시대의 조짐인 수 많은 변란과 자연의 재앙이 끊이질 않는 당시의 정치적 여건은 미륵신앙이 민중과 결합하게끔 만들었고, 민중은 지금이 세상을 변혁시켜 용화세계를 실현한다는 혁명성을 갖기에 이르렀다. 특히 민중의 혁명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지역일 수록 미륵신앙이 강한 곳이라는 점은농민군의 사상적 기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어느 곳보다 승려들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지역도바로 미륵신앙이 강한 곳이다. 전 호에서 썼듯이 백양사의 운응스님을 비롯하여 금산사, 선운사, 불갑사 등의 승려가 대개 농민군과 함께 움직였다는 점은 곧 `동학'농민군의 사상적 동력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사상은 그 자체로서는 힘이 없다. 사상이 대중과 결합할 때 사회를 변화발전시키는 물질적 힘을 얻는다. 같은 뿌리를 둔 신앙임에도 하나는 서방정토에 있는 아미타불의 품을 그리는 믿음으로 갈라지고, 다른 하나는 대중이 디딘 이땅에 용화세계를 만드는 구원자가 온다는 미륵사상으로 되었다. 봉건말기 체제를 변혁시키는 물질적 힘이었던 민중은 후자에 더 친근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결을 꺼낸 이후부터 당시의 농민군은 확고한 믿음을 갖고 체제에 대항한다. 비결을 꺼낸 3개월 뒤인 삼례집회 때는 추운 동짓달인데도 수천 명이 모여 열흘을 버텼고, 전주감영으로 몰려갈 때는 수가 만여명으로 불어났다. 다음 해 보은집회 때는 농민들이 소를 팔고 땅을 처분하여 모인 대중의 수가수만 명이 되었다. 미륵불의 출현을 갈망하던 민중에게 선운사마애석불 비결이 꺼내졌다는 소식은 그만큼 새세상이 다가 왔다는 확신을갖게 한 일대 전기가 됐다.

어쩌면 존선조 내내 탄압 받던 불교열기에 왕조 말기에 민중과 결합하는혁명성으로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서 동 석/불교인권위양심수대책위원장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