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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나 : 구상[시인]

기자명 법보신문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나는 일찍이 열다섯살에 가톨릭수도원 신학교엘 들어가 수학하다가3년만에 환속을 하고는 그뒤 일본 도꾜로 유학을 갔다. 입시를 본 곳은일본대학 종교과와 명치대학 문예과였는데 요행 두곳이 다 합격이된지라 역시 문학보다는 구경적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종교학전공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대학종교과의 커리큘럼이란 그 60%가 불교경전의 주석이요, 나머지가 종교의 학문적 이론이나 체계, 또는 기독교나 여타 종교의개론등으로 좋던 궂던 불교의 여러 경전강의를 날마다지시피 3년동안들어야 했다.

이것이 내가 불교를 접하게 된 동기로서 기독교인으로서는비교적 불교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있다고 알려지고 또 때마다 땡땡이중같은 소리를 한다고 놀림을 받는 연유이기도 하다.

저러한 학창생활중에서 오늘 날까지도 내 뇌리에 강열하게 남아있는추억 한두가지를 소개하면 첫째 도모마쯔 엔데이라는 산문출신의 교수가불교개론 시간에 십악도중 기어의 죄를 설명하면서"이 기어란 비단같은말, 즉 번드레하게 꾸며낸 말이란 뜻인데 이렇듯 교묘하게 꾸며서 겉과속이 다른, 즉 실재가 없는 말, 진실이 없는 말을 잘해서 이죄를 가장많이 범하는 게 누군가 하면 바로 종교가들이나 문학가들이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들이나 문학가들은 이런 기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뒤 한시도 고통이 멈추지 않는 무간지옥에 떨어져(요새 우리 말의 표현으로 하면)혀가 만발이나 빠지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나는 그때도 이미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이었고 비록 종교가는 아니요일개 신자지만 저 교수의 말씀에 등어리가 써늘해지는 느낌이었고 그후50년 동안 글을쓸 때마다 저 교훈이 경종처럼 울려온다.

또 하나 그때 내가 가입했던 학생써클인 `노두행'도 역시 불교적인이타행을 몸소 실천해 보는 그런 모임이었는데 즉 달마다 한번씩 정해진날, 전원이 모여서 지도교수(역시 스님이였는데 그 법명을 잊었음)의설법을 듣고는 일제히 무작정 거리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각기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인데 가령 길바닥에 떨어진휴지나 쓰레기를 줍는다든가, 교통이 번잡한 네거리에서 어린이나노인네의 부축을 한다든가. 화물자동차의 짐부리기를 도우거나 손수레나딸딸이의 뒤를 밀어 준다든가, 또 조금 교외로 나간 사람은 밭에 김매는것을 거들어 주는 등 아주 사소한 선행을 남모르게, 소위상을 내지 않고하고 그 실천행의 보고서를 제각기 교수에게 써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스님(지도교수)은 우리가 노두행을 떠날 때마다 "무슨 선행을하려고 마음을 지어먹지 말라!오직 그대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인정을쓰면 그만이다"라고 타이르시기도 하고, 또는 우리의 실천수기를 보신소감을 말씀하실 때 언급하시기를 "그대들이 노두행을 하고는 그 베푼이들에게서 어떤때는 담배 한대 차 한잔, 모밀국수 한 그릇, 또는 술한잔, 김밥 몇 개씩을 대접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대들이 가령취직을 하려고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녔다면 그런 공껏은 얻어 걸리지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이타행에 완전히 나아간다면 어떻게 먹고 살까,어떻게 입고 살까, 어떻게 잠자리를 갖추고 살까. 검정 안해도 그 모두가스스로 갖춰지게 마련이니라"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 스님(교수)은 이타즉 베품이란 크고 장한 자선행위나 헌신행위로 알고 자신은 그런 소유나능력이 없다고 그것의 실행을 외면하는 이들이 많다면서 <잡보장경>에나오는 `무재칠시'를 쳐들곤 하셨다.

즉 가진 게 없이도 베품에 나아가는일곱가지 가르침으로 눈으로 베풀고, 얼굴로 베풀고, 말로 베풀고, 몸으로베풀고, 마음으로 베풀고, 자리로 베풀고, 방으로 베푸는것인데 이것의주해는 그야말로 문외한이 설법을 하는 것 같아 삼간다.

아뭏든 저러한 학창생활로 학점을 따고 채우기 위해서라도 하였던불교공부가 나의 청춘의 정신적 홍역과 함께 기독교적인 나의 신앙에폭풍과 내란을 몰고 왔었음은 피치 못할 사실이었다고나 할까!

특히나 기독교적인 신, 즉 진리의 인격화에 대한 회의와 갈등과 부정으로 오뇌에 휩싸여 지냈다. 물론 그뒤 차차 신학이나 불교의 공부나묵상을 통하여 기독교에서도 인식론적 추구에 있어서는 하느님, 즉진리를 제일원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알았고 또 불교에서도 진리 즉 법,그 자체를 섬김의 대상으로 할때는 인격화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소위 나자렛 예수, 즉 신의 육화사상도 법의 화신사상이나대동소이함을 깨우치게 되지만 항상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런 진리에대한 공통적 숭앙이 어째서 서로 반목하고 배척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다가 지난 65년 가톨릭의 로마공의회에서 <비그리스도교에관한선언>이 이러한 나의 숙년내의 고민을 말끔히 가셔주었다고나 하겠다.여기에 그 선언의 일절을 소개하면 "가톨릭교회는 이들 <비그리스도인>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는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라고 되어 있고 이 선언문의 현실화로 마침 그 해에 입적하신 효봉큰스님 영전에 고 노기남대주교가 조문을 하였고 가톨릭의수녀들이 연도(연도-가톨릭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합송하였다. 그때 나의감동과 감격이 어찌나 컸던지 나는 나의 자전시점인 <모과 옹두리에도사연이 70>에 그 사실을 시화해 놓았다.

저러한 가톨릭의 선언은 내가 비단 가톨릭교도이어서가 아니라 모든종교인에게 거짓없이 실천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 자세라고 생각하여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저 선언으로 말미암아 정신적 역정에 큰 안도와기쁨을 가져와서 그야말로 나는 인연에 의해 나자렛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진리에 나아가게 되었고 또 어떤이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라, 또 어떤이는 마호멧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를 신봉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지없이마음편하다고나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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