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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칼럼-나는 구구인가

기자명 박완서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일전에는 용산쪽에 사는 이가 나를 초대했는데, 그쪽 지리에 어두운 나를위해 남영역까지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주겠다고 했다. 시간이 안맞는 경우 몇번이라도 역주변을 돌겠노라고 하면서 차 번호랑 핸드폰번호까지 일러주었다. 나는 남영이라는데는 처음 가보는데라 어디서 갈아타야되나 전철노선표를 펴놓고 꼼꼼하게 예습을 하고나서 떠났다. 요즘처럼 주차 사정이나쁜 때는 그저 차 얻어타는 쪽에서 먼저 가있는게 수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약속시간보다 십오분가량 먼저 남영역에 도착했다. 나는 만원짜리 회수권을 쓰는데 그게 마침 다 되어 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큰일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마중 나오기로 한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군데서있는 것도 걸치적댈 정도로 역 주변의 인도는 좁고도 복잡했다. 이십분,삽십분이 지나도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이 뭔가 잘못 된 모양이었다.아마 이럴때 써먹으라고 핸드폰 번호를 알려줬지 싶어 번호를 적어놓은 쪽지를 찾았다. 그 쪽지를 지갑 갈피에 찔러넣은 생각은 나는데 핸드백속에 지갑이 없었다. 나는 지갑을 빼놓고 핸드백만 들고 나오기를 잘하지만 소매치기를 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어서 우선 집에 전화를 걸어봐야 할것 같았다. 전화카드도 핸드백속에 없길래 잔돈을 찾았다. 워낙 큰 백이고안주머니와 곁주머니까지 있는지라 잔돈푼이 숨어있을데가 많았다. 그러나아무리 손을 넣고 휘저어봐도 십원짜리 한푼 만져지지 않았다. 시간은 약속시간에서 거의 한시간 가까이나 경과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기다리는 걸단념하고 남영역사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에 자리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핸드백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온갖 잡동사니들을 다 쏟아놓고 바닥까지 훑어도 어쩌면 땡전한푼 만져지지 않았다. 복잡한 역사안에서 내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내친 김에 수첩갈피까지 뒤지고나서 쏟아놓은것들을 수습했다. 그때까지도 가까운 은행만 찾으면 현금카드로 돈을 찾을수 있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용카드도 지갑과 함께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더럭 겁이 났다. 나를 이 낯선 곳에 세워놓고 마중을 나오지 않은 이에 대해서도 분노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지갑도 궁금하고 궁금한 것천지인데 알아볼 방법이 없었고, 첫째 돈없이 내집으로 갈 수 있는 아무런묘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 65세만 넘으면 노인증이나 주민등록증만 보이면 공짜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돈을버는 노인이니까 돈내고 표사서 다니는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야말로 그따위 잘난척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공짜표를 청하러 창구로 가려다말고 생각하니 노인증은 아예 발급도 안받았고 주민등록증도 잃어버린 지갑안에 있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이 벼락치듯 내 맹한 정신을 때렸다.

여기서 우리집이 도대체 몇리나 되며, 방향은 어느 방향일까? 여기서 같은 서울 시내일까? 나는 갑자기 남역역 주변이 서울의 어떤 곳과도 닮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길을 잃은게 서울이 아닌 어느 먼 낯선 도시처럼 여겨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여기가 어딘지 알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 알기위해서 빨리 집안 식구 누구하고라도 연락이 닿아야 할 것같았다. 그러나 무슨 수로 전화를 걸것인가. 남영역 앞 인도에는 전화부스가 열개 가까이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현금으로 걸수있는 데를 지키고 서서 누군가가 돈을 남겨놓은채 수화기를 내려놓지않고 나오는데가 없나 잔뜩 눈독을 들이고 기다렸다. 그날 따라 아무도 거스름돈을 남겨놓지 않았다. 길에 나가면 가끔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독자를 만나게 된다. 돈 남은 공중전화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남은 희망은 단 하나 누가 나를 알아보는 거였다.

나는 다시 역사안으로 들어가 승객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계단밑에 턱 쳐들고 서서 누가 나를 알아보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누군가가 박완서씨 아니세요? 하고 말을 걸어온다면 그렇다고 하고 나서 오백원만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는척을 안했다. 거기가 어딘지 종잡을 수 없는 아득한 마음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더 막막한 무서움증으로 변했다.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카드나 주민증없는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그때 내가 남영역에서 잃은건 지갑도, 길도 아니라, 명함만한 주민증이나 카드에 불과한 나자신이었다. 다행히 역전엔 빈 차가 많이 늘어서 있어서 있었다. 선금없이 집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러나 나는 선뜻 타지 못하고 기웃대며 카폰이 있는 차를 찾았다. 전화를 통해서라도 내 자식이건 친구건, 아무튼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기 전에 그냥 집으로 가봤댔자 집에 아무도 없을 수도, 혼자문따고 들어간 집에 돈도 지갑도 없을 수도 있었다.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박완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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