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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를 위한 불교산책-업설의 바른 이해

기자명 박경준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자유의지에 입각한 창조적 노력으로 해석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인도사상의 시대적 조류에 상당부분 빚을 지고 있지만, 부처님은 다른 파의 업설과 윤회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다른 파의 업설과 윤회설은 적어도 영원불변의 자아의 실체를 인정하는데반해, 불교는 인연소생의 생명관에 입각한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하면서 자아의 실체 관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다른 파에서는 영혼의 사후상속을 설명함에 있어, 자아라는 총알이 업이라는 화약의 힘에 의해 발사되어 일정한 장소로 가고 다시 그로부터 새로운 화약에 의해 다른 장소로 발사된다는, 이른바 영혼의 불멸에 기초하는 윤회를 말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그러한 총알의 항존(恒存)을 부정하며 화약과 그 힘에 의한 윤회만을 인정하는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윤회설과 무아설은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종종 곡해되기도 한다. 리즈 데이비즈(Rhys Davids) 같은 학자도 “말하자면 당시 유행하던 관점이 불교의 근본교리 중에 부가된 것이 업보윤회설인데,이것은 무아설과 같은 불교의 근본교리와도 모순된다”고 말하면서, 불교의 업설은 일반 대중을 교화하기 위한 단순한 방편설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견해를 정당한 것으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이 문제는 일찍부터 불교학상의 난제(難題)로 간주되어 오고 있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업보설과 윤회설은 불교의 인생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것을 떠나서는 인생의 다양한 현실상을 설명할 수 없고, 나아가 삶의 이상을 설계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이것을 논리성이 결여된 부가물로 단정지워버리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

석존의 생명관을 바르게 이해하고 보면, 오히려 업설과 윤회설은 불교에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철학적 의의를 갖게 된다. 업이라는 것은 생명에 빌붙어 작용하는 종속적 힘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 자기창조를 행할 때의내적 규정이기 때문이다. 업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미래를 창조하고 개척하는 것은 그 본질이 무한한 창조력을 지닌 잠재적인 의지이기 때문이지 결코업 자체에 불가사의한 신비력이 숨어 있기 때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얼마나 중시했으며 자유의지에 입각한 선과창조적 노력을 얼마나 강조했는지를 우리는 신의론(神意論) ·숙명론 ·우연론 등의 3종 외도(外道)에 대한 석존의 비판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해할수 있다. 자유의지에 입각한 도덕적 책임과 창조적 활동을 고려하지 않은사상과 종교는 모두 사도(邪道)로서 비판했던 것이 석존의 기본 입장이었다.이러한 3종 외도에 대한 비판내용을 통해 볼 때, 불교는 숙명론을 분명한사도로 규정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어떠한 교설도 숙명론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우리가 지금 문제삼고 있는 업설역시 마찬가지다. 불교의 업설은 실로 자유의지에 입각한 도덕적인 삶과 창조적 노력을 역설하고 있다할 것이다.


박경준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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