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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칼럼-행위예술의 대 연출가 정주영

기자명 리영희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현대건설 정주영 명예회장의 황소 5백마리가 또 이북(以北)으로 간다는 소문이다. 이번에도 정주영 노인이 손수 끌고 갈 지, 따로 갈 지는 알 수 없으나 세상은 또한번 감동적인 일대 드라마를 목격하게 될것이다.

내가 소가 또 `북한'으로 간다고 말하지 않고 굳이 귀에 설은 `이북'으로 간다고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국토 분단후, 철든 나이로 남쪽에 내려 온 이른바 실향민 제1세대의 심정에는 남과 북의 땅이 언제나하나였다. 몸은 가지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차라리 꿈으로는 언제나 왕래해 왔다. 실향민 제1세대에게는 저쪽과 이쪽의 땅이 칼로 잘라진 것같은, 또는 뭔가 완전히 달라진 존재가 된 것 같은 어감을 지니는 `남한'과 `북한'이라는 정치용어에 미묘한 거부감을 느낀다.

원래 `남한' 태생의 사람들에게는 `북위 38도선'의 저쪽은, 또는 6·25전쟁 정전 이후에는 `휴전선' 저쪽의 땅은 `북한'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잔인하고 화약냄새가 풍기는 `휴전선'을 넘어 온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직은 같은 조국의 가상적이고 편의적 호칭에 불과했던 `북위 38도선'을 `잠깐' `이웃 찾는 심정'으로 넘어 와서오늘에 이르는 실향민 제1세대들에게는, 그들이 떠나온 고향땅은 `북한'이기보다는 아직도 `이북'일 뿐이다. 그래야 마음이 덜 괴롭고 덜아프다.

그것은 어쩌면 언어의 최면술일 지 모른다. 사실이 그렇다. 그것은틀림없는 언어의 최면술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렇지 않고서는 용어(낱말)의 하나에도 눈물이 앞서기에 `북한'보다는 친근감이 있는 `이북'을고집하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지금 두 눈이 젖어 흐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흔히 `실향민'이라는 행정통계적 분류에 드는 사람들 사이에도 심정의 차이는 크다. 이북 고향 땅에 회상할 만한 삶의 추억을 남긴 것 없이, 철 들기 전에 부모 따라 내려 온 `실향민 제2세대'에게는, 정주영노인의 황소 떼가 가는 땅은 `이북'일 수도 있고 `북한'일 수도 있다.더욱이 이남으로 내려 온 뒤에 남한에서 태어난 `제3세대'와 그 뒤 세대에게는, 정주영 영감의 황소 떼는 `북한'으로 `끌려가는 것'뿐일 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는 소떼를 이끌고 가는 돈많은 8순 노인이 일종의 돈키호테이거나 고작해서 `돈자랑 하려는 호사가'일 수도 있으리라.

사실, 한 달 전에, 정주영씨가 제1차분의 소떼를 끌고 판문점을 넘어가는 감동적인 장면을 보면서, `그거 어디 소가 갔나? 돈이 갔지!'라고빈정대는 저명한 어떤 `실향민' 지식인의 글을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있다. 민족통일 운동에 열성적인 이 실향민 지식인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자기같은 열렬한 통일운동가도 돈이 없으면 가지못한다는 남·북관계의 이상한 일면을 꼬집은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어쩐지 병적인 면으로 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정주영 회장은 우리 겨레의 속담인 `돈 있으면 금수강산이오, 돈 없으면 적막강산이라'를 입증했다. 돈이 있으니 이북의금강산 묘향산 등 금수강산이 온통 그의 것이었다. 그뿐만도 아니다.그렇게도 나라의 대문을 굳게 잠그고 고집불통인 저쪽 권력자들을 기뻐서 어쩔줄 모르게 만들었으니,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속담이 빈말이 아님도 실증한 셈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쩐지 그런 속담의 진리보다는, 조금 표현이 거칠어서 미안하지만 `돈은 거지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라는 속담이이 경우에 어울려 보인다. 마찬가지 뜻으로 `돈은 더럽게 벌어도 깨끗이 쓰면 된다'는 속담이 더욱 어울린다.

`정주영 재벌'의 재산이 아버지의 소판 돈 70원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긴 과정에 많은 우여곡절과 시비의 소지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역대 정권과 재벌들의 부패와 오늘의 IMF사태가그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래도 코카콜라로 한국인의 입맛을 송두리채 버리게 한 것을 시작으로 술만 들여다가 `물장사'로 치부한 재벌총수보다는 백배 나을 것같다. 60년대에 기계류를 수입한답시고 국민의 혈세로 특혜를 받은 돈으로 거대한 기계포장 상자들 속에 사카린을 밀수입하고, 미국군 납품용이라는 명분으로 들여 온 아이스크림을 국내에 뿌려서 말썽나자, `전재산을 국고에 헌납'하기로 선언했다가 소모용·소비재만으로 치부한 `순 장사꾼' 재벌총수와는 질적으로 달라 보인다. 적어도 그는 돈놀이 장사보다는 시종일관 `실물생산'으로 이나라의 경제의 물질적 뼈다구를 키워 왔다는 경제평론가들의 평이 과히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치부하는 방법과 목적을 이루는 스타일의 문제다. `돈의 권력'인 다른 재벌들과의 비교와 별도로, `정치권력'들과의 비교에서도 그렇다.

이승만은 분열을 일삼은 잔꾀 `교(巧)'로 망했고, 박정희는 힘만을믿은 `위(威)'때문에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전두환은 천하에 무도한횡포 `포(暴)'때문에, 그리고 노태우는 그 최상의 지위에서도 성장시의찌들은 가난때문에 돈만 챙긴 `탐(貪)'으로 인생을 망쳤다. 김영삼은머리와 속은 텅 비었으면서 겉만 꾸미려한 `위(僞)'의 삶으로 세상에얼굴을 들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았는가의 차이는 그 사람이 늙어서 인생을 마감하려고 할 때, 삶을 `청산(淸算)'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사람이 사는 스타일이다.

한 번도 만나 본 일은 없지만, 정주영이라는 노인이 동생과 자식들을 데리고 황소떼를 이끌고 또 휴전선을 넘어 `이북'의 고향, 부모의묘지를 찾아가는 순수한 조선사람다운 나들이를 텔레비전으로 보는 날을 나는 각별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나의 눈에는 차라리그 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멋진 행위예술 같기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 정주영은 세계에 한국의 이름을 떨친 대 기업인이면서 동시에뛰어난 행위예술의 대 연출가라고 말하면 지나친 말이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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