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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밭에서의 약속

기자명 우봉규
  • 사회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상도 청년이 놓고 간 떡엔 독약이 들어 있었지만

고봉 스님은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첩첩 산으로만 둘러싸인 아득한 산내리.
위를 올려다보면 동그맣게 하늘만 보이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 끝 산언덕에 산내암이라는 조그만 절이 있었습니다. 그 절에는 백 살도 넘은 노스님 한 분과 고봉이라는 동자승이 살고 있었습니다. 노스님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어린 고봉스님 또한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고봉스님이 노스님을 대신하여 탁발을 할 때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고봉스님의 바랑에 하나 가득 곡식들을 채워주었습니다. 비록 산내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지만 언제나 서로를 위하고 사는 정겨운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달이 환하게 밝은 밤이었습니다.
노스님의 심부름으로 마을을 다녀오던 고봉스님이 키 높이 자란 수수밭을 지날 때였습니다. 이상하게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수수밭이 흔들렸습니다. 고봉스님은 잠시 멈춰 서서 수수밭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분명 수수밭에서 어른거리는 것은 사람의 그림자였습니다. 어린 고봉스님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검은 그림자는 잘 자란 수수를 꺾어 커다란 자루에 넣고 있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얼른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남의 잘못을 보면 안된다” 노스님의 그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대로 발이 움직여주질 않았습니다. 고봉스님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자루에 수수를 가득 채운 그 그림자가 밭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검은 그림자는 산내리 동구밖 외딴집에 사는 상도라고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은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무꾼인 상도는 마을에서도 착하기로 소문난 청년이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상도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였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놀라기는 상도 청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눈빛이 마주친 고봉스님과 상도 청년은 잠시 서로의 얼굴만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윽고 고봉스님 앞에 상도 청년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작은 스님, 이번 한번만 모른 척 해주세요. 그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고봉스님은 다시 합장을 하였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약속할 수 있지요?”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상도 청년은 몇 번이나 고봉스님에게 절을 하고는 재빨리 사라졌습니다. 고봉스님은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내리에는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대대로 대문이 없어도, 방문을 잠그지 않아도 아무 근심걱정 없이 살아온 평화로운 마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들어 밭의 곡식이나 집집의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 자꾸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비록 상도 청년과 누구에게도 오늘 본 것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은 하였지만 고봉스님의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점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마을에서 상도 청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고봉스님은 그 밤을 홀딱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노스님이 고봉스님을 불렀습니다.
“어제 마을에 내려갔다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
노스님의 말씀을 듣고 고봉스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 아닙니다.”
고봉스님은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인석아, 네 얼굴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써 있는데도 바른대로 말하지 않을 작정이냐? 오늘 아침까지 네 방에 불이 꺼지지 않았단 말이다. 거짓말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인 줄 알고 있지?”
노스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고봉스님은 상도 청년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잠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약간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노스님, 저 사실은….”
“사실은?”
노스님의 눈빛이 부리부리 빛났습니다.
고봉스님은 눈을 꼭 감았습니다.
“어제 달이 밝아서 두고 온 엄마 생각이 나서 그만….”
고봉스님은 일부러 양손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제야 노스님이 한껏 웃었습니다.
“하하하, 녀석. 달을 보고 엄마 생각을 했다아, 하기야 나도 너만할 때 달만 밝으면 부모님 생각을 했지. 그렇지만 부처법을 따르는 부처님 제자가 그렇게 약해서야 어찌 평생을 산 속에서 보내겠느냐. 이번만큼은 특별히 용서할 터이니 다음부터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노스님.”

간신히 노스님의 추궁에서 벗어난 고봉스님은 어제의 일을 잊기 위해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그러나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게 하루를 보낸 그 날 밤.
법당 마당에서 누군가 노스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노스님, 노스님 계십니까?”
고봉스님은 재빠르게 뛰어갔습니다. 아뿔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 상도 청년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도 청년은 고봉스님은 못 본 체하고 노스님만 불렀습니다. 상도 청년의 손에는 작은 보자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드디어 노스님의 방문이 열렸습니다.
“자네가 웬 일인가?”
“예. 노스님께 이것을 드리기 위해서….”
상도 청년은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었습니다. 보자기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수떡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허, 이 밤중에 이것을 주기 위해 왔는고. 고맙기도 하지. 밤이 늦기는 했지만 잠깐 들어오게.”
“아닙니다. 저는 또 할 일이 있어서….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상도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고봉스님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쏜살같이 사라졌습니다.
“참 먹음직스럽게도 생겼다. 고봉아, 너도 예 앉거라.”
고봉스님은 숨이 차올랐습니다.
“왜 그러느냐, 앉지 않고?”
“예.”
고봉스님은 자신을 쳐다보던 상도 청년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이 수수떡이 예사 떡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확하지도 않은 것을 노스님께 말씀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자아, 어서 먹자.”
노스님이 수수떡 하나를 손에 들었습니다.
고봉스님은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습니다.
“노스님, 안됩니다!”
고봉스님은 노스님의 손에 있는 수수떡을 빼앗아 냉큼 자신의 입 속에 넣었습니다.
“아니!”
노스님은 너무나 놀라 고봉스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았습니다.
고봉스님의 눈엔 눈물이 하나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그 순간 노스님은 어렴풋 고봉스님의 행동에 무슨 까닭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였습니다. 노스님은 떡을 입에 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고봉스님 앞으로 수수떡을 밀어주었습니다.
“아이고, 그렇게 그 떡이 먹고 싶으면 너 혼자 실컷 먹어라.”

고봉스님은 얼른 수수떡을 들고 노스님 방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입에 넣었던 수수떡을 토하고, 남은 수수떡을 구덩이를 파고 몽땅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고봉스님이 수수떡을 묻었던 그 자리에 수 십 마리의 들쥐들이 죽어있었습니다. 그 수수떡에 독약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봉스님은 죽은 들쥐들을 정성스럽게 묻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고봉스님은 노스님께도, 마을 사람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하였다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상도 청년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날.
상도 청년은 남몰래 산내암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노스님은 물론이고, 고봉스님도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죄목이 탄로날까봐 고봉스님은 물론이고 노스님도 죽이려고 했던 상도 청년. 그도 더 이상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상도 청년은 다음날 가족들을 데리고 산내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수수밭 언덕에서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시던 노스님께서 옆에 있는 고봉스님을 보고 싱긋 웃었습니다. 고봉스님도 노스님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습니다. 아름다운 산내리는 다시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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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규 님은 1960년생. 극작가. 민족 설화와 분단에 관한 순수 희곡 작품에 주력해왔다. 『남태강곡』으로 삼성문학상을,『석정시의 불교적 해명』으로 해인상을 수상, 『눈꽃』이 한국일보사의 광복 50주년 기념작에 당선되었다. 대표 동화작품으로는『금이와 메눈취 할머니』,『파랑새』,『마리산』,『흰빛, 검은빛』등 다수가 있다.


최유경 님은 1977년생.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로 졸업한 후 현재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그림동화2』, 『초등학생을 위한 톨스토이 단편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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