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⑤ 김기추 거사 (1908∼1985)

기자명 이재형

20세기 한국의 유마거사

85년 9월 16일 입적

백봉 김기추(1908~1985) 거사는 한국의 유마거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50세를 훨씬 넘어 불교에 입문했지만 용맹정진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20여 년간을 후학지도와 중생교화에 힘쓴 위대한 선지식이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격동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사람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마는 백봉 거사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이도 드물다.

1908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1923년 부산제2상업학교에 입학, 뒤늦게 설립한 일본계 학교를 ‘부산제1상업학교’라고 하는데 반발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하며 수난의 세월은 시작된다. 20세 때 부산청년동맹의 3대 위원장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형무소에 수감되고, 만기출소 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끊이질 않자 만주로 망명 동만산업개발사를 설립해 운영하던 중 다시 구금되기도 했다.

<사진설명>묵산 스님과 함께 한 김기추 거사.(왼쪽)


독립운동 후 화두수행

당시 만주는 일제의 잔학이 극에 이른 곳이었다. 백봉 거사가 살아생전 고백했던 것처럼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과 폭력으로 반죽음을 만들거나 칼로 머리를 자르는 잔혹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 전력이 있던 백봉 거사가 만주의 감옥에서 살아나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해보였다. 당시 그는 비록 불교신자는 아니었지만 사방의 벽이 관세음보살로 빼곡할 정도로 벽에 그 명호를 쓰고 염송했다. 그 가피였을까. 일본 간수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난 그는 해방을 맞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간사장을 맡아 극빈자들에게 쌀을 무상으로 배급하다 또다시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보림회 설립 재가선 보급

백봉거사가 수행에 힘 쓴 것은 1963년 6월, 그의 나이 56세 때다. 충남 심우사에서 우연히 무자(無字) 화두를 접한 그는 용맹정진을 하던 중 다음해 정월 『무문관』의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는 글귀를 보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 때 방광(放光)을 하여 대중들이 삼배의 예를 올렸으며, 때마침 종소리에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물은 물 뫼는 뫼 스스로가 밝더구나’란 오도송을 읊는다.

이후 재가불교단체인 보림회를 결사한 뒤 금강경과 유마경을 중심으로 재가수행열풍을 일으켰다. 이후 대전을 거쳐 부산에 내려가 보림선원을 개설해 10년간 주석하며 남녀노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대중을 오묘한 불교의 세계로 이끌었다.

2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그는 1985년 9월 16일(음력 8월 2일) 여름 철야정진 해제 법어를 마치고 자신의 방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적멸에 들었다. 저서로는 『금강경강송』, 『유마경대강론』, 『선문염송요론』 등과 법어집 『도솔천에서 만납시다』 등이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