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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고봉 스님 (1890∼1961)

기자명 김형섭

화계사 숭산 스님의 은사

1961년 9월 28일 입적

고봉(1890∼1961) 스님은 현대 한국 선불교를 대표한다. 평소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한 고봉 스님은 근대 선불교를 이끈 선지식이며, 쇠망하는 국운을 만회하려 애썼던 위대한 독립투사로 그 명성이 드높다.

고봉 스님은 1890년 9월 29일(음력) 대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 자손으로 태어나 여러 학문을 두루 접한 고봉 스님은 당시 젊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사회적 혼란을 평정할 독립운동가가 되기를 마음먹는다.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인해 행여 집안에 누를 끼칠 것을 염려해 혈족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출가를 결심한다.

1911년 9월 고봉 스님은 양산 통도사에서 혜봉 선사와의 만남으로 불가(佛家)와의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혜봉 선사와의 만남으로 그의 입산 목적 자체가 바뀌게 된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불경 탐독에 매진한 고봉 스님은 ‘경허 선사 일대기’를 접하면서 불교에 심취하게 된다.


선지식 찾아 전국 만행

그리고 고봉 스님은 경허 선사와 같이 ‘콧구멍 없는 소’를 깨치기를 발원한다. 그 길로 전라도 석금산을 거쳐 인적이 드문 외딴섬을 거쳐 대구 파계사 성전에 이르러 견성 오도에 이른다. 1915년 4월 고봉 스님이 출가한지 4년 만이다. 파계사 마당에 있는 바위 위에서 홀로 좌선에 들었던 고봉 스님은 눈앞이 밝아지면서 헤아릴 수 없는 법열(法悅)을 느끼고 홀연히 개오(開悟)의 경지에 이른다.

비바람 가고 나니/ 밝은 태양 솟아났네/ 푸른 산 흰구름/ 눈앞에 뚜렷하니/ 흐르는 물소리 시원도 하여라.

그후 고봉 스님은 전국을 돌며 선지식을 찾아 법거량(法擧揚)을 하게된다. 전국을 돌며 깨달음의 경계를 확고히 한 고봉 스님은 자신의 경계를 인증 받기 위해 만공 선사가 주석 하는 덕숭산 정혜사를 찾아 나선다.


일제치하 대구사건 주도

만공 선사 아래에서 여러 해를 지낸 고봉 스님은 어느날 “만주에서는 독립당이 조직돼 나라의 주권을 찾고자 온몸을 바치는데 , 나만 홀로 산중에서 이렇게 열반락(涅槃樂)을 즐길 수 는 없다”며 승복을 벗어던졌다.

고봉 스님은 그 길로 대구로 내려가 항일운동을 시작한다. 1919년 3월 8일 이른바 ‘대구 사건’을 주도한 장본인이 고봉 스님이다. 고봉 스님은 대구 만세운동을 주도한 죄로 1년 6개월간 감옥에 갖혀 온갖 고문을 당했고, 이때 입은 상처로 말년까지 몸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사진설명>제자 숭산 스님과 함께(앞줄 가운데).


그 후 1950년 공주 마곡사 은적암, 아산 봉곡사, 대전 복전암, 서울 미타사 조실을 역임한 고봉 스님은 1961년 8월 19일 화계사에서 세수 72세 법랍 51세로 열반에 들었다.

원래 말수가 적고 글 한자 남기기를 꺼리는 고봉 스님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많지 않다. 고봉 스님의 유일한 상좌인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은 생전의 은사 고봉 스님을 이렇게 기억한다. “당시 만공 화상에서 제일 가는 선지식”이라고 회고했다.


김형섭 기자 hsk@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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