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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서경수 박사 (1925~1986)

기자명 권오영
인도철학 대중화 견인

1986년 10월 14일 입적


혜안 서경수(1925∼1986) 박사는 긴 수염과 반짝이는 대머리의 외모만큼이나 학계에서는 당대의 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국내 최초로 인도 네루대에서 5년 동안 한국의 언어, 역사, 문화 등 한국학을 가르쳤던 인도철학자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도불교철학을 국내에 대중화시킨 장본인이었다. 또 종교간의 대화가 전혀 없던 70년대 후반 불교와 기독교간에 ‘종교대화’를 처음으로 시도함으로써 동서양 종교의 비교연구에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925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서 박사는 나라 잃은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늘 개탄하며 ‘우리 고유의 것을 지키겠다’는 민족 주체성을 가슴 한구석에 키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극도에 달했던 1940년. 경성중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청년 서경수는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한쪽 폐를 잃는 시련을 겪게 된다.


東大 인도철학 초대교수

그가 주도해 만든 독서회에서 당시 판매 금지된 춘원 이광수의 좬흙좭을 읽었다는 이유에서다. 5개월 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이듬해 그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울대 종교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대학에서 기독학생회를 조직할 정도로 기독교에 심취했던 그는 차츰 기독교에 대한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동양을 무시하고 서양 우위론을 강조하던 종교학과 교수에 염증을 느꼈고, 무엇보다 기독교의 배타주의에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56년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58년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교 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사진설명>78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 스님, 이기영 박사와 같이 한 서경수 박사(좌).


성철 스님이 법명 줘

63년 동국대 인도철학과가 신설되면서 초대 교수로 부임한 서 박사는 이 때부터 인도불교철학을 난해한 학문 영역에서 벗어나 대중 속에서 함께 숨쉬는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밑거름을 제공했다.

그는 특유의 논리적인 해법을 통해 불교 철학을 자연스럽게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이후 그는 스승이자 도반이었던 이기영 박사와 더불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와 한국불교연구원을 이끌며 공동연구, 공동수련을 통해 불교인재를 키우는데 앞장섰다. 신행활동을 통해 그는 불교를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부처님을 닮아가려 했던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던 그는 그의 나이 환갑이 되던 해 85년, 이기영 박사의 소개로 부인 김미영 선생과 결혼을 하게된다. 그러나 비운의 역사를 살아왔던 그에게 가족의 행복을 맛보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듯 그는 1986년 10월 14일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그의 딸이 태어난 지 21일 만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성철 스님이 직접 지어주었다는 그의 법명 혜안(慧眼)만큼이나 날카로운 눈으로 한국불교를 현대화시키는데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했던 서경수 박사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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