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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⑥ (3) ‘중대불교’의 사회적 배경 - 상

백제 고구려 멸망시키고 당 세력 축출 후 일통삼한(一統三韓) 자부심 표출

왕실과 귀족불교에서 평민과 노비 포함, 전체 구성원으로 확대
통일 이후 귀부한 귀족과 관리, 신분과 능력에 따라 역할 부여
3배 늘어나 영토 따라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대도 확대 재편

경주 대왕암 내부.
경주 대왕암 내부.

신라는 3국을 통일해 원신라에 비해 3배의 영토와 인구를 지배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정치·경제·사회·사상·종교·예술 등 문화전반에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신라인 자신은 이러한 변화를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28대 진덕여왕(647~654)에서 29대 태종무열왕(654~661)으로의 교체를 ‘상대(上代)’에서 ‘중대(中代)’로,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중고(中古)’에서 ‘하고(下古)’로 바뀐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은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삼국통일기에 들어와 불교경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신라의 불교철학체계를 성립시킬 수 있었으며, 불교대중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됨으로써 왕실과 귀족층을 주체로 하였던 불교를 끌어내려 평민과 노비계층까지 포함하는 전체 구성원을 교화의 대상으로 확대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불교를 그 이전 시기의 ‘중고불교’와 구분하여 ‘중대불교’라고 명명하고, 불교의 질적 변화와 양적 확대의 역사적 의의를 추구하여 보려고 한다. 그런데 불교 변화의 역사적 의의를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변화의 배경으로써 사회적 발전이 어떠한 내용과 성격을 가진 것인지 먼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3국 가운데 제일 후진으로 동남지방의 모퉁이에서 일어난 신라가 3국의 항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7대 나물마립간대(356~402)부터였다. 이때부터 김씨가 욍위세습권을 독점하고 낙동강 동쪽의 경북 일대를 지배하는 상당히 큰 연맹왕국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중국 북조왕조의 하나인 전진의 부견에게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국제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가야와 왜를 동원해서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고구려 후원을 받은 사건을 계기로 하여 자주적인 발전에 제약이 되었다. 19대 눌지마립간대(417~458)에 이르러 백제와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고구려의 압력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24대 진흥왕대(540~576)에는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점유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나, 백제의 원한을 사게 되어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의 침공을 받는 위기를 초래하였다. 28대 진덕여왕대(647~654)에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김춘추는 당 태종을 면담하여 나당군사동맹을 체결하였는데,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 평양 이남, 백제의 토지는 신라가 영유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마침내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는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 30대 문무왕대(661~681)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신라의 기대와는 달리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은 당의 점령지가 되어 각기 도독부를 설치하고 당의 관리와 주둔군을 두어 관리케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두고 문무왕을 그 도독으로 임명하는 한편 백제의 왕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고 회맹을 강요함으로써 신라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신라와 당의 갈등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마침내 폭발하여 나당전쟁에 돌입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부흥군을 지원하면서 당군과 7~8년간의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였다. 문무왕 16년(676) 마침내 당의 세력을 반도에서 축출하고 대동강으로부터 원산만에 이르는 선을 경계로 하여 그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데 그치었다. 고구려의 광대한 영역 대부분을 상실하고 백제의 전역과 고구려의 서남부 일부 지역만을 점유하는, 완전한 의미의 통일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신라는 처음 3국의 항쟁에 뛰어들면서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었고, 생존을 위해 당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3국의 통일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다시 당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인으로 하여금 3국통일의 주체가 되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자부심은 이른바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으로 표출되었다. 당과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 양성된 이러한 통일의식은 백제와 고구려 지역의 새로 편입된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발현케 하였다. 3국은 각기 지역이 구분되고 오랜 역사를 통하여 정치를 달리하였으며, 그 이전 한번도 같은 국가의 주민으로서의 생활경험도 없었지만, 고구려 유민과 연합해서 이민족인 당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동일 종족으로서의 동류의식이 성장해 갔다. 원래 비슷한 외모와 동일한 언어, 그리고 대동소이한 풍습 등에서 동류의식을 갖게 하였으며, 더욱 끊임없는 주민의 이동과 경계선의 빈번한 변동은 이질감을 해소시켜 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러 요인은 3국 사이에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치열한 전쟁을 겪으면서도 언어와 풍습이 크게 다른 이민족인 한족이나 거란・말갈 등과는 확연히 구분케 하였다. 신라는 일찍이 23대 법흥왕대(514~540)에 본가야를 합병하면서 그 왕족을 우대하여 진골귀족으로 편입하고, 그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24대 진흥왕대(540~576)에 대가야를 병합하고, 한강 유역을 점유하면서 순수비를 세워 새로 편입된 주민을 차별하지 않을 것임을 포고하였다.

그런데 삼국통일전쟁이라는 국제적인 전쟁을 치루면서 ‘중고’시기의 신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의식이 높아지고 세계관이 확대된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와 30대 문무왕대(661~681)는 3국 주민의 통합의식이 더욱 확대되고 세련되었다. 태종무열왕 7년(661) 백제의 국도 사비성을 함락하고 돌아와서 논공행상을 할 때, 귀부한 백제 관원에 대해서도 그 재능을 헤아려 등용케 하였는데, 좌평(1품)·충상(忠常)·상영(常永)과 달솔(2품) 자간(自簡)에게는 일길찬(7등)의 관위를 주어 총관직에, 은솔(3품) 무수(武守)에게는 대나마(10등)의 관위를 주어 대감직에, 은솔 인수(仁守)에게는 대나마의 관위를 주어 제감직에 각각 보임하였다. 다음 문무왕은 당에 대항하는 고구려의 부흥군과 귀부한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였다. 특히 문무왕 10년(670) 고구려의 귀족 안승(安勝)을 우대하여 고구려왕을 책봉하고 그의 무리와 함께 금마저(전북 익산)에 안주케 하였으며, 14년(674)에는 다시 그를 보덕국왕을 삼고, 20년(680)에는 왕의 누이를 시집보내고 많은 예물을 내려주었다. 

안승의 예는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삼국사기’ 직관지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관원의 처우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문무왕 13년(673)에는 백제인 귀부자에게 내외관직을 수여함에 있어서 그 본국에서의 관등 여하를 참작하여 경관(京官)에 있어서는 (백제의) 달솔(2품)은 대나마(10등), 은솔(3품)은 나마(11등), 덕솔(4품)은 대사(12등), 간솔(5품)은 사지(13등), 나솔(6품)은 당주(14등 吉次에 해당), 덕장(7품)은 대오(15등)에 배정하였다. 그리고 외관(外官)에 있어서는 달솔은 선간(나마와 동급), 덕솔은 상간(대사와 동급), 간솔은 간(사지와 동급), 나솔은 일벌(길사와 동급), 장덕은 일척(대오와 동급)에 배정하였다. 이로써 백제인들에게는 비교적 낮은 관위를 배정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는데, 5두품과 4두품 등 하급귀족의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인에 비해 고구려 귀족 안승은 진골 대우를 받았고, 여타 출신도 백제인보다 다소 상위의 관품을 배정받는 등 우대하였다. 신문왕 6년(686)에 고구려인에게 경관직을 수여하였는데, 역시 본국에서의 관품을 참작하여 주부(3품)는 일길찬(7등), 대상과 대형(7품)은 사찬(8등), 위두대형(혹은 종대상)은 급찬(9등), 소상(혹은 적상)은 나마(11등), 소형(11품)은 대사(12등), 제형(12품)은 사지(13등), 선인(13품)은 길차(14등), 자위(14품)는 오지(16등)에 배정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출신은 6두품・5두품・4두품 등 역시 하급귀족으로 편입됨으로써 본국의 관품에 비하여 1등급 하위의 관등으로 차별을 받았으나, 백제인보다는 다소 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인에 대한 외관직 규정은 전하지 않는데, 고구려 영역은 대부분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가 점유한 예성강 이북 대동강 이남 지역도 성덕왕 34년(735)에 이르기까지 당이 신라의 소유를 공인해 주지 않아 군현을 설치하지 못하고, 외관도 파견할 수 없었던 사정과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통일을 전후해 군사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있었는데, 군대편성에서 신라인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말갈 출신의 새로 귀부한 군인들도 선발 채용하였다. 그렇게 편성된 대표적인 군단이 9서당(誓幢)이었다. 9서당은 신문왕 7년(687)에 완성된 중앙의 핵심적인 군단이었다. 9서당은 원래 모병에 의하여 조직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삼국통일 뒤에 군단 수효가 점차로 증가하면서 옷깃(衿) 색깔의 구분에 의하여 녹금(綠衿)・자금(紫衿)・백금(白衿)・비금(緋衿)・황금(黃衿)・흑금(黑衿)・벽금(碧衿)・적금(赤衿)・청금(靑衿) 등 9개의 군단으로 정비되었다. 

그 가운데 백금서당은 문무왕 12년(672)에 백제인, 황금서당은 신문왕 3년(683)에 고구려인, 흑금서당은 신문왕 3년(683)에 말갈인,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은 신문왕 6년(686)에 보덕성민, 청금서당은 신문왕 7년(687)에 백제잔민(반란여중)으로 조직하였다. 외래인으로 조직된 이들 6개 군단은 자진 귀부자나 투항자, 또는 포로자 가운데 정예의 인물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국가에게 충성을 맹세한 국왕의 직속부대였던 것으로 보이며, ‘중고’기의 6부체제와 관련하여 귀족들이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6정(停) 대신에 삼국통일 뒤인 ‘중대’의 핵심 군단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신라는 통일 뒤에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신문왕 5년(685)에 전국을 9주(州)로 정비하였다. 9주는 옛 신라 및 가야의 지역에 사벌주(상주)·삽량주(양주)·청주(강주)의 3개주, 옛 백제의 지역에 웅천주(웅주)·완산주(전주)·무진주(무주)의 3개주, 옛 고구려의 지역에 한산주(한주)·수약주(삭주)·하서주(명주) 등 3개주로 할당되었다. 9주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 왕조인 우(禹)의 9주(州)를 모범으로 하여 의식적으로 계획된 것으로 보이는데, 곧 삼국통일 주체자로서의 긍지의 소산으로써 천하관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렇게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룩하면서 삼국의 귀부한 귀족·관리·군인 기타의 주민을 포섭하여 각기 신분과 능력에 따라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며,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하였으니, 이것이 곧 신라로 하여금 소(小)에서 대(大)를 이루게 한 소이였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81호 / 2021년 4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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