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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문경 운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대세지보살좌상

기자명 이숙희

봉안된 건 지장보살인데 회수된 건 대세지보살? 

1993년 한겨울 감쪽같이 사라진 운암사 아미타불상 협시보살
24년 만에 한 사립박물관장 수장고서 관음·대세지보살상 회수
1920년대 사료기록과는 달라…원봉안처에 향한 의구심 들기도

사진1) 운암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아미타불좌상 87.8cm), 조선후기. 직지사성보박물관 제공.
사진1) 운암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아미타불좌상 87.8cm), 조선후기. 직지사성보박물관 제공.

1990년대 들어 경상도 지역의 사찰에서 연쇄적으로 불상들이 도난된 적이 있다. 그런 와중에 1993년 1월9일 문경 운암사 극락전에 봉안돼 있던 아미타불상의 협시보살인 목조관음보살상과 목조대세지보살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사진 1). 이 보살상 두 구는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도난 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주지가 사찰을 잠시 비운 틈을 타서 훔쳐간 것으로 보인다. 

보살상과 달리 간신히 도난 위기에서 벗어났던 본존불 목조아미타불좌상은 극락전 보수를 위해 요사채로 잠시 옮겨졌을 때 요사채가 원인 모를 화재로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 2007년 11월15일 오전 4시였다. 이 사건은 1984년 4월 전남 화순 쌍봉사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17세기 목탑 형식의 대웅전이 신도들의 부주의로 촛불에 의해 한순간에 사라졌던 기막힌 사연을 연상케 한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 도난됐던 운암사 보살상 두 구가 뜻밖에도 2016년 10월에 서울 한 개인의 사립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돼 회수했다.

문경 운암사(雲巖寺)는 678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이후 조선 초기까지의 연혁이 명확하지 않다. 사적기에 기록된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전각을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고 6·25한국전쟁으로 다시 폐사되었다가 1972년에 이르러 극락전, 산신각, 요사채, 삼성각, 안양문 등이 건립되어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운암사 극락전 안에는 근래 새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상과 ‘후불도’가 모셔져 있고, 삼성각에는 1939년에 제작된 ‘칠성도’ ‘독성도’ ‘산신도’가 있을 뿐이다. 운암사와 관련된 문헌상의 자료가 많지 않아서 사찰 연혁이나 규모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기록된 사찰의 재산대장과 ‘조선총독부 관보’ 제1178호에 의하면 운암사는 김룡사(金龍寺)의 말사로 목조아미타불상, 목조관음보살상, 목조지장보살상, 석조아미타불상 한 구와 ‘신중탱’ ‘현왕탱’ ‘산신탱’ ‘후불탱’ 두 점, 부도 두 기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1920년대 운암사에는 아미타불상과 관음·지장보살상으로 구성된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회수된 불상은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이라는 사실이다. 불상의 구성으로 볼 때 운암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사찰 측의 기록과 다르다는 점에서 유감스럽게도 원봉안처가 아닐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불상의 원봉안처와 소재지가 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부터 억불정책이나 전란 등에 의해 사찰이 폐사되거나 불이 나서 소실되면, 불상이나 불화와 같은 불교문화재는 인근에 있는 다른 사찰로 옮겨서 봉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문경 혜국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의 경우,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해 1684년 수화승 금문이 조성한 것으로 지금은 폐사된 인근의 금학사(金鶴寺)에 안치되었던 불상으로 밝혀졌다. 문경 내화리에 있는 절터는 신라시대 창건된 화장사(化庄寺)였으나 오래전에 불타버려 폐사된 이후 불상 등은 문경 사불산의 대승사로 옮기고 삼층석탑만 남아 있다. 

문경 갈평출장소 내에 세워진 오층석탑 역시 관음리 불당골의 폐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불법 매매됐고 원 절터에서 반출돼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다. 문경 운암사도 마찬가지로 전란으로 인한 파괴가 있었고 6·25한국전쟁 때에는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리는 등 피해가 극심했기 때문에 원래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다른 사찰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사진2) 운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 후기, 높이 79.6cm. 문화재청 제공.
사진2) 운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 후기, 높이 79.6cm. 문화재청 제공.
사진3) 운암사 목조대세지보살좌상, 조선 후기, 높이 79.6cm. 문화재청 제공.
사진3) 운암사 목조대세지보살좌상, 조선 후기, 높이 79.6cm. 문화재청 제공.

운암사 보살상 두 구는 높이 79.6cm로 손모양만 반대로 되어 있을 뿐, 크기나 형태에서 똑같다(사진 2, 3). 원래 머리 위에는 꽃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과 관대가 있었으나 관음보살상의 보관은 없어진 상태이다. 머리카락은 틀어올려 상투모양으로 묶었는데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내려와 있지 않은 것이 조선시대 보살상으로는 이례적이다. 

얼굴은 네모나며 목이 짧고 상체는 밋밋하게 처리되어 있다. 몸에는 여래식으로 옷을 입었는데 가슴 위에는 수평으로 입은 내의가 보인다. 오른쪽 어깨 위에 걸친 옷자락은 완만하게 늘어지면서 마무리되었으나 왼쪽 어깨에 수직으로 흘러내린 깃부분의 상단이 접혀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다리를 덮은 옷자락은 가운데에서 힘있게 펼쳐지면서 끝단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스타일의 보살상은 17세기 후반의 문경 혜국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과도 비교되는 것으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라 생각된다. 특히 관음보살상의 손바닥에 정병을 세우기 위한 작은 구멍이 남아 있는 것도 매우 유사하다.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흔히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구제와 이익을 주거나 지혜의 빛으로 모든 중생의 미혹함을 없애주는 힘을 가진 보살로 알려져 있다. 그 형상을 보면, 관음보살은 보통 아미타화불(阿彌陀化佛)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대세지보살은 보관에 수병(水甁)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나 손에는 모두 병이나 연꽃을 들고 있다. ‘무량수경’과 ‘아미타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표현되는 것이 원칙이나 고려시대 이후에 지장보살이 크게 유행함에 따라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한 짝을 이루는 예들이 등장하였다.

문경 운암사 보살상 두 구와 함께 도난된 ‘후불도’ 한 점은 아직 소재지를 알 수 없다. 다행히 도난되기 전에 조사된 화기에 의하면 1811년 4월 문경 재악산 운암암 극락전에 봉안하기 위해 불화승 수연, 유심, 선준, 정민, 달인 스님 등이 함께 제작했던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임이 분명하다. 화면구성을 보면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권속인 보살상과 사천왕상을 배열하고 상단에는 아난과 가섭 등 그 제자들을 빽빽하게 그려 넣어 19세기 불화 구성과 특징을 보여준다.

근래에 들어 도난 불교문화재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문경 운암사 아미타삼존불상의 협시보살상은 돌아왔건만, 본존 아미타불좌상은 화재로 인하여 완전 소실되어 삼존불상의 원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583호 / 2021년 4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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