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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법 만나 바뀐 인생 부처님께 회향합니다

기자명 법보

[신행수기 당선작] 108산사순례회주상 - 김영심

7년 전 길에서 쓰러져 병원서 뇌경색 진단 받고 맺은 불교와의 인연
도반이 선물해 준 ‘금강경’ 읽으며 자나깨나 관세음보살님 생각하고
몽중·명훈가피 경험하며 절로 나는 신심에 절서 살길 발원…공양주 돼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40대 중반 어느 겨울날, 남편과 길을 걷다 쓰러졌다. 남편을 나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둘러 병원에 가야 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구토와 어지럼증…. “살라달라” 소리를 지르고, “차라리 침대에 묶어달라” 울부짖었다. 그렇지만 남편이 해줄 수 있는 건 안아주고 함께 울어주는 것뿐이었다. 왼팔의 마비가 시작되고야 병원을 찾았다. 뇌경색이었다. 수술은 불가능하고 약물치료만 가능하다고 했다. 약을 먹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당시 아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아픈 몸보다 아들의 대학입시가 더 걱정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의 집착이 병을 더 키운 것 같다. 아들의 친구 엄마에게 대입 합격 여부를 기가 막히게 맞추는 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수소문해 그곳을 찾았다. 스님은 “무조건 합격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다만 “조만간 주변 사람 중 세 명이 사망할 수 있으니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돈이 없어 아픈 몸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형편에 천도재라니….’ 답답함에 화를 내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님의 ‘죽음’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연세가 많은 어머니, 언니도 나도 건강이 좋지 않으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시는 그 두려움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집 언니가 자기가 다니는 절에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앞선 일도 있고 해서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자 “내 처지가 안타깝고 몸도 좋지 않으니 잠시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고 토닥였다. 그러면서 “절에 다니고 말고는 인연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면 될 일”이라고 덧붙였다. 

며칠 후 방문한 언니의 절에는 아주 맑아 보이는 스님 한 분이 계셨다. 스님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정성스레 차도 내려주었다. 그리고는 어떠한 말도 없이 고요히 앉아계셨다. 적막이 흘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간의 일들을 스님에게 말씀드렸다. 스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느 순간 설움에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창피함도 부끄러움도 없이 한참을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한 달에 세 번 법회에 참석했다. 스님의 법문도 좋았지만 불자들의 따뜻함에 법회가 없는 날에도 절을 찾았다. 공양주 보살님의 음식이 좋아 절에 온다는 신도들도 많았다. 법당 청소도 하고, 불기도 닦고, 공양간 일도 도우면서 더 이상 이웃집 언니의 절이 아닌 내가 다니는 절로 마음이 변해갔다. 하루는 스님이 나를 “백련화 보살님”이라고 불렀다. 처음으로 법명을 받은 것이다. 너무 행복해 이렇게 예쁜 법명을 받아도 되는지 물었더니 스님은 환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름표를 만들어 달고 다닐 만큼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었다.

공양간 보살님이 법명을 받은 기념으로 ‘금강경’ 한 권을 선물해 주었다. 그 모습을 보신 스님이 “하루에 일곱 번을 읽어야 하는데 가능하겠냐”며 “힘들면 하루에 세 번만 읽어보라”고 했다.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나에 대한 걱정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금강경’을 받은 날 여덟 번을 읽었다. 한 번이라도 더 읽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읽고 또 읽었다. 시간이 갈수록 속도도 빨라져 새벽에 시간을 정해 매일 정성스럽게 ‘금강경’을 독송했다. 덧붙여 머리와 입으로는 늘 ‘관세음보살님’을 놓지 않았다.

매일 가는 절은 버스를 타도 30분은 가야 할 거리였음에도 걸어 다녔다. 그 시간을 올곧이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며 정진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그렇게 절약한 버스비 2000원은 보시함에 넣었다.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인지, 열심히 걸으며 꾸준히 걸은 덕분인지 건강도 조금씩 회복돼 갔다. 

아들도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 독경과 염불 수행을 이어가며 잠을 잘 때도 ‘금강경’을 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속에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금강반야바라밀경’ 여덟 글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빛에 침대 옆 검은 옷을 입고 서 있던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금강경’을 보니 글씨가 구멍이 날 정도로 타 있었다. 신비한 체험을 한 후 더욱 정성을 들여 기도했다. 또 하루는 뼈만 앙상한 어떤 할머니가 관 속에 누워 큰 소리로 “네 신랑 죽는다”고 소리치는 꿈을 꾸었다.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그러던 중 남편의 동료가 어떤 사람에게 폭행을 당해 세상을 뜨는 일이 발생했다. 며칠 뒤에는 남편의 직장 상사가 기숙사에서 자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또 남편의 사촌 형님이 새벽에 산책을 하다 가로수가 쓰러지면서 깔려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며칠 사이 남편 주변에 연이어 사망 사건이 발생하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스님에게 예전 점을 본 이야기와 최근의 일들을 말씀드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스님은 ‘천도재’를 지내자고 했다. 스님의 권유에 따라 돌아가신 세 분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를 정성을 다해 모셨다. 그날 밤 너무나 아름다운 분이 내 앞에 나타나 세 번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하구나. 착하구나. 착하구나.” 하는 꿈을 꾸었다. 관음재일 아침 일찍 절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서 본 아름다운 그분은 대웅전 탱화 속 관세음보살님이었다. 또 한 번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생각하니 신심이 절로 솟았다. 

독경과 염불은 계속됐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한가지 답답함이 생겨났다. 한문본 ‘천수경’과 ‘금강경’을 읽다보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도 ‘관세음보살님’을 염송하며 열심히 절을 향해 걷고 있는데 ‘바른불교 바른실천 불교입문교육’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이곳에서 부처님 공부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해 보라며 격려해주셨다. 

바로 그곳 법당에 가 300배를 올리고 불교입문교육 입학신청서를 작성했다. 불교대학에 다니며 삼천배, 참선, 철야정진기도 등에 동참했고, 봉사활동에도 빠지지 않았다. 당시 회사를 다닐 때라 퇴근 후 법당에 들려 300배 절을 한 뒤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는 ‘금강경’ 사경을 일자일배로 행했다. 방대한 양의 부처님 공부를 단계별로 밟아갔고, 보살계를 받으면서 ‘상락화’라는 법명을 다시 받았다. 

그러던 중 연세가 많아 항상 걱정이었던 엄마가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연락이 왔다. 엄마의 수발을 자청한 언니가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다. 그러나 ‘긴 병 앞에 장사 없다’는 옛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3개월이 지났을 때 언니에게서 “병간호가 너무 힘들다”며 우리 집으로 모셔가라 연락이 왔다. 사실 중풍에 쓰러진 엄마를 모실 형편은 안됐지만, 엄마니까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언니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렇게 엄마를 집으로 모신지 며칠 되지 않아 언니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엄마를 요양병원에 모시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엄마에 대한 걱정,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언니의 말대로 엄마를 요양병원에 모셔드렸다.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에 더 슬픈 일인 것 같다. 요양병원에서 생활한 지 이틀 만에 엄마는 육신의 옷을 벗고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절망감, 더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오열했다. 엄마가 떠난 날은 마침 우란분절 백중 날이었다. 요양병원 바로 옆 작은 절에서는 백중기도가 한참이었다. 마음을 추스르려 찾은 그곳에서 “백중날 맞추려고 이렇게 급하게 가셨냐”며 울고 또 울었다. 부족하지만 정성을 다해 엄마의 49재를 모셨다. 49재 막재를 봉행한 날 쪽 찐 머리에 하얀 한복을 입은 엄마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었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기도와 수행, 절 일에 더욱 열심히 매진했다. 엄마를 떠나보낸 허전함을 채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회사에서 일을 할 게 아니라 차라리 절에 들어가 절 일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일단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니던 회사에 “그만 다니겠다”며 사표부터 냈다. 어떻게 하면 절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은 ‘공양주’였다. 무엇보다 가족의 허락이 필요했다. ‘법화경’을 세 번 사경한 후 가족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동안 기도와 수행, 봉사가 일상이었고, 부처님을 만난 후 집안에 좋은 일이 이어진 만큼 가족들도 큰 반대 없이 절집 생활을 허락했다. 

‘저의 손이 감로의 손으로 변하여 저의 음식을 드시는 대중스님들이 건강하시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겠습니다.’

좋은 인연으로 널리 알려진 한 기도도량의 공양주가 됐다. 매일 새벽 1시 부처님께 1000배를 올렸다. 그러나 대중스님들께 공양을 올린다는 것이 신심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해야 했고, 피곤하거나 아프다고 빠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루 세 번 재료를 다듬어 음식을 만들고 뒷정리까지 마치면 하늘에는 이미 별이 총총했다. 다행히 부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음식하는 일은 금세 익숙해졌다. 매 순간 뿌듯한 마음으로 스님들께 공양 올렸다. 

부처님께서 내 마음속에 항상 같이하며 명훈가피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고 계신다고 확신한다. 지금은 공양주 소임을 떠나 남해 화방사에서 사무장으로 일하며 기도와 수행, 봉사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바른 법을 만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원하면서…. 마하반야바라밀.

[1586호 / 2021년 5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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