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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정방사 주지 혜일 스님

3000일 관음정진으로 세운 절 ‘힐링도량’으로 일궈갈 터!

어머니 법정사 원만화 보살 독립운동가 동화 스님 시봉
아버지 별세로 가세 기울어 초등학교 졸업 후 동진출가
중고생 때 불교학생회 조직 덕암 스님 친견 후 정식출가
낙산사 홍련암서 관음기도 가피 내려 日 대정대학 유학

세 번째 1천일 관음기도 중 ‘불사원만성취’ 몽중가피
두 차례 걸친 중창불사로 사격 갖춘 도량으로 우뚝
올레6코스·선정의길 활용 ‘정방사세심길’ 가동 준비
“절경 품은 길 걷다보면 매 찰나가 좋은 순간 직감”

정방사 주지 혜일 스님은 “부처님의 존귀함을 찾아 떠나는 성지순례가 신심을 북돋듯, 나를 찾아가는 ‘세심(洗心)길 걷기’가 환희를 샘솟게 할 것”이라고 전했다.
정방사 주지 혜일 스님은 “부처님의 존귀함을 찾아 떠나는 성지순례가 신심을 북돋듯, 나를 찾아가는 ‘세심(洗心)길 걷기’가 환희를 샘솟게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은하수(漢)에 떠 있는 별 하나쯤 가볍게 낚아 당겨(拏) 품을 만큼 높게 치솟은 뫼(山) ‘한라산(漢拏山)’. 산정에서 사면으로 흘러 내려간 기운들은 제주 들판에 368개의 오름을 솟게 했다. 곱게 빻은 쌀 수북이 쌓아놓은 듯해 미악산(米岳山)이라 했다는 ‘솔오름(쌀오름)’은 서귀포 남쪽 땅에 불쑥 드러나 있다. 그 오름에서 시작한 물길(동홍천)은 정모시를 지나 폭포수로 응집된 직후 곧장 바다로 떨어진다. 아시아 유일의 해안폭포인 ‘정방폭포’다.

‘정방폭포의 못(수원)’이라는 의미를 함축한 정모시의 쉼터 곁에 정방사가 자리하고 있다. 1931년 서귀포 영천동에 창건될 때만 해도 쌍계사(雙溪寺)였다. 서홍동(1934)으로 이전했다가 1935년 현재의 동홍동에 들어섰는데, 연혁비에 따르면 남하(南夏) 스님이 창건했다. 정방폭포에서 500여 미터, 도보로 9분 남짓의 거리에 자리하고 있으니 사명을 정방사로 바꾸었을 터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콘크리트 대웅전의 작은 절에 지나지 않았던 정방사는 1997년 5월 혜일 스님이 주석하며 중창불사를 일으켜 사격을 일신했다.

정방사 대웅전과 세심각.
정방사 대웅전과 세심각.
정방사 곁에 정모시가 흐른다.
정방사 곁에 정모시가 흐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어렸지만 급격히 기울어가는 가세를 알 수 있었다. ‘절에 가면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초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 손 잡고 서귀포 구룡사로 들어섰다.(1964)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법정사를 다녔던 원만화(이의열) 보살. 절 살림 어려우면 직접 탁발해 부처님께 올릴 공양을 손수 준비했을 만큼 신심이 돈독했다. 1918년 ‘법정사항일운동’을 주도한 동화 스님을 지극정성으로 시봉한 보살로도 유명하다. 아마도 부친이 별세한 직후인 그 언제였을 것이다. 절에서 ‘한글 반야심경’을 가져온 어머니는 잠들기 전이면 꼭 아들에게 “읽어달라” 했다.

‘ …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

그렇게 5번이나 10번을 읽다 보면 어느 새 어머니도 자신도 잠에 들었다.

절 마당 쓰는 일 하나도 게을리하지 않은 동진출가승은 ‘천수경’은 물론 ‘초발심자경문’도 철저히 배워갔다. 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었지만 절에서는 승복을 입었던 ‘스님’은 서귀포중학교와 남주고등학교의 불교학생회를 이끌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의 덕암 스님이 보림사 법회에 오신다는 전언이 들려왔다. 훗날 태고종 총무원장·종정에 오른 덕암 스님은 1970년대 초부터 내외명철한 선지식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덕암 스님을 친견한 순간 환희가 차올랐다.

“큰스님, 시봉하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법륜사로 오너라.”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 법륜사로 걸음했다.(1970) 그때 덕암 스님은 아차산 영화사에 있었고, 법륜사를 창건한 대륜 스님(태고종 전 종정)이 주석하고 있었다. 4년여의 시간이 흘러 대승계를 받은 혜일 스님에게 대륜 스님이 일렀다.

“길을 떠나거라!”

만행 길에 오르라는 뜻이었다. 봄물 흐르는 날 떠난 발길이 처음으로 닿은 곳은 서쪽 대표 관음도량인 강화 보문사였다. 길에서 잘지언정 그 어느 곳에서도 두 번 머물지 않았다. 늦가을에 이르렀을 때 동쪽의 관음도량 낙산사에 닿았고, 이내 설악산 봉정암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길 떠난 지 1년이 다 되어가던 무렵 서울로 돌아왔다. 삼청공원 벤치에 몸을 맡긴 채 하룻밤을 보내니 새벽녘부터 몹시 배가 고팠다. 칠보사로 들어가 아침공양 하고는 석주 스님을 친견했다.

“큰스님, 시봉하고 싶습니다.”

태고종에서 조계종으로 승적을 옮기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참회하게! 덕암 스님을 시봉하게.”

칠보사에서 걸어 내려와 법륜사에 거의 이르렀을 때 택시 한 대가 절 앞에 멈춰 섰다. 대륜 스님 문안 인사차 온 덕암 스님이 내렸다.

“혜일, 이리 오너라!”

덕암 스님은 혜일 스님을 곧장 영화사로 데려갔다.

1980년 3월 선암사에서 강원을 졸업했지만 허전함이 밀려왔다. 만행길에 만났던 낙산사 홍련암으로 가 기도를 올렸다.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영화사에서 덕암 스님을 시봉하면서도 매년 한 번씩 홍련암으로 걸음해 관음기도를 올렸는데, 1982년에는 ‘3·7일 철야관음기도’를 올렸다. 가피가 내렸다. 1983년 봄, 덕암 스님의 도반인 도쿄 관음사 주지 인봉 스님의 후원으로 현해탄을 건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지 보증인이 없으면 출입국이 어려웠더랬다. 인봉 스님의 물심양면 후원에 힘입어 대정대학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정법원을 개원해 현지 포교에도 남다른 노력을 경주했던 혜일 스님이다.
 

덕암 스님의 ‘엄명’으로 법륜사 주지 소임(1993,3∼1997,3)을 본 혜일 스님은 1997년 5월13일 제주도로 건너 왔다. 정방사 주지를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14일이 부처님오신날이었다. 콘크리트 대웅전, 33㎡도 채 안 되는 요사채 2개에 신도카드 40장이 전부였다.

“부처님! 정방사 토대를 새로이 다져가며 전법에 매진하겠습니다!”

15일, 천일관음기도에 들어갔다.

1000일에 1000일이 더해지고 또 하나의 1000일이 쌓여 3천일 관음기도를 회향했다. 지금까지 두 번의 중창불사가 있었는데 대웅전은 2011년 낙성됐고 단청은 2013년, 2층 건물의 세심각(洗心閣)은 올해 완공됐다. 그 사이 3305㎡의 도량에 삼성각과 범종각, 요사채 등이 속속 들어섰다. 정방사 24년 중창불사를 진행하는 동안 번잡한 일들이 많았을 터인데 그 힘겨움 어떻게 홀로 견뎌냈을까? 정방사 주지 혜일 스님은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불보살님 가피입니다.”

2008년 11월 입재한 세 번째 1000일 기도를 하던 2010년 10월 꿈에 관세음보살님이 현현하셨다. 관음보살님은 혜일 스님의 오른손을 들어 공책 위에 얹었는데 그 아래에는 ‘佛事圓滿成就(불사원만성취)’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몽중가피(夢中加被)였다고 확신합니다.”

그해 11월 대웅전이 낙성됐다. 기도 가피에 관한한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다는 혜일 스님은 법륜사에서 사미시절을 보낼 때 대륜 스님이 전한 일언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원력을 세워 기도할 때는 ‘1주일 참회기도’부터 해라. 그리고 발원은 분명히 해라. 가피는 분명히 있다!’ 후학들에게도 이 말씀만은 그대로 전하고 싶습니다.”

정방사 주지를 맡은 혜일 스님은 어린이여름학교부터 열었다. 1997년 7월 첫선을 보인 어린이여름학교는 24회를 진행했다. 코로나19가 닥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셈이다.

“매년 평균 60명 전후의 아이들이 참여해 왔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을 주시해야겠지만 올해는 가능한 개최하려 합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캠핑법회’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앞에 텐트를 설치해 쉬고 묵어가며 대웅전에서 설법 듣고 세심각에서 차 한잔하며 재미있는 강의를 듣는 프로그램입니다.”

천수천안 합창단·봉사단도 조직했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느낌과 생각을 음으로 표현한 것이 음악’입니다. 기쁨과 슬픔, 나아가 성스러운 느낌까지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나와 너’를 너무도 잘 소통시키기에 인종과 국경에 걸림 없는 ‘초월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용이한 전법방편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노래하고 연주하며 듣는 사이 우리의 삼업은 청청해집니다. 미세한 변화라도 그것은 선한 쪽, 상생의 방향으로 진행되리라 확신합니다. 법(法)을 얹은 선율 닿는 그곳이 정토입니다. 그 선율 안은 불자들이 지역 곳곳에서 봉사한다면 정토는 그만큼 더 확장됩니다.”

혜일 스님이 최근 역점을 두고 있는 건 ‘정방사 명상·힐링의 길-세심길(가칭)’이다.
 

아시아 유일 해안폭포인 정방폭포.
아시아 유일 해안폭포인 정방폭포.
한라산이 담긴다는 소천지.
한라산이 담긴다는 소천지.

“정방사는 제주올레 6코스와 제주불교 성지순례길인 ‘선정의 길’ 구간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정방사를 중심으로 한 산사와 정방폭포, 소천지를 잇는 다양한 루트를 활용한다면 반응은 매우 클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자문해 봅니다. 무엇을 시작할 때 생겨나는 설레임? 어떤 결실을 맺는 순간 느껴지는 희열? 둘 다 중요합니다. 다만 저는 시작과 결실 사이의 과정 하나하나도 온전히 받아들이며 행복에 젖어보기를 권합니다. 절경을 안고 길을 걷다 보면 ‘매 찰나가 좋은 순간’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존귀함을 찾아 떠나는 성지순례가 신심을 북돋듯, 나를 찾아가는 ‘세심(洗心)길 걷기’가 환희를 샘솟게 할 것입니다.”

어린이청소년법회·합창단 활성화, 세심각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체험, 그리고 명상의 길. ‘힐링도량’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고 있음이다.

은사인 덕암 스님으로 받은 가르침 하나를 청했다.

“‘어찌하면 중노릇 잘합니까?’ 은사 스님을 시봉할 때 자주 여쭈었습니다. 은사 스님께서는 한결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승려는 원력이 있어야 한다. 승려는 약속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승려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 늘 가슴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지남으로 삼아온 선·경구를 부탁드렸다. 눈 내리는 봉정암 길을 오를 때 생각난다는 서산대사의 선시다.

‘눈 내린 들판 밟아 갈 때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발자국 뒷사람의 이정표라!’
혜일 스님의 내어 보인 걸음이기도 하다. 제주의 절경 속 ‘힐링도량 정방사’가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혜일 스님은
1964년 제주 구룡사 동진출가.
1971년 사미계 수지.
1975년 대승계 수지.
1980년 선암사 강원 졸업.
1987년 일본 대정대학 불교학과 졸업.
1991년 대정대학 대학원 불교학 석사학위 취득.
1993년 불이성 법륜사 주지.
2005년 종사 법계 수지.
2007년∼ 정방사 주지.
2012년 태고종 법규위원회 위원.
2013년 태고종 총무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2019∼2021년 태고종 제15대 중앙종회 차석부의장.
2021년∼ 태고종 호법원장.

 

[1588호 / 2021년 6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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