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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순천 정혜사 목조관음보살상 및 대세지보살상

기자명 이숙희

도굴꾼은 왜 불상 아닌 보살상을 훔쳐갔을까

도난당한 보살상 2구, 사립박물관서 발견돼 25년 만에 회수
화려한 보관의 보살상은 근엄한 불상보다 친숙한 이미지 줘
불교문화재 돈으로 인식하는 구매자 있는 한 도난 근절 안돼

사진1)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 후기, 높이 107cm. 문화재청 제공.
사진1)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 후기, 높이 107cm. 문화재청 제공.
사진2) 목조대세지보살좌상, 조선 후기, 높이 107cm. 문화재청 제공.
사진2) 목조대세지보살좌상, 조선 후기, 높이 107cm. 문화재청 제공.

순천 정혜사 대웅전(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청소리 716번지)에 봉안됐던 목조관음보살상과 목조대세지보살상 두 구가 1992년 9월1일에 도난됐다(사진1, 2). 두 구의 보살상은 1997년 8월 서울 한 개인의 사립박물관에서 구입한 후 수장고에 은닉하다가 2016년 10월 서울 경찰청과 문화재청이 공조수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돼 압수됐다.

순천 정혜사 창건에는 여러 설이 있다. 통일신라 8세기 보조국사설, 혜철국사 창건설, 고려시대 13세기 혜소국사설 등이다. 이 가운데 ‘혜소국사제문’(송광사성보박물관 소장)에 수록된 내용이 가장 설득력 있다. 고려 중기 승려인 혜소국사(慧炤國師)가 정혜사를 창건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그의 제자들이 대규모 도량을 이뤘다는 내용이다.

혜소국사는 송광사 6세 원감국사 충지 스님(冲止, 1226~1292) 스승으로 알려져 있으나 행적은 상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에 따르면 정혜사는 계족산에 위치한 사찰로 부처의 치사리(齒舍利)가 봉안돼 있고 고려시대 원감국사 충지 스님이 주석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증승평지’(1618)에는 옛부터 정혜사가 아주 큰 절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소실된 후 다시 절을 중창했는데 승려가 아주 적었다는 내용이 있어 사찰이 17세기 전반까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혜사 대웅전 수리보고서’(문화재청, 2001)에 따르면 ‘정혜사대웅전상량문’(1854)에는 1617년 신욱 스님이 중창한 대웅전이 세월이 오래돼 기둥과 서까래가 퇴락하여 전복될 지경이고 대흥사에서 가져온 법당의 불상까지 풍우를 뒤집어 쓴 듯 쇠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료들을 정리해보면 정혜사는 부처 사리가 봉안됐을 만큼 중요했던 곳으로 고려시대 이후 조선 초기까지 대찰로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3) 정혜사 대웅전 목조아미타삼존불상(도난전). 순천 정혜사 제공.
사진3) 정혜사 대웅전 목조아미타삼존불상(도난전). 순천 정혜사 제공.

현재 정혜사 대웅전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 수미단 역시 중수를 여러 번 거쳤으나 구성과 조각 솜씨는 17세기 불교 공예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청판과 안상(眼象) 안에 운룡문을 중심으로 동자문과 구룡을 상징하듯 아홉 구의 귀면 등이 장엄하게 투각된 것이 특이하다. 수미단 위에는 아미타불좌상을 주존으로 좌우에 관음과 대세지보살상이 배치된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이 봉안돼 있었으나(사진3) 현재 아미타불상만 남아 있고 협시보살상은 근래 새로 만든 것이다.

회수된 목조관음과 대세지보살좌상은 107cm 높이로 크기나 형태가 거의 같다. 손 위치만 좌우가 다를 뿐이다. 머리 위에는 높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꽃모양 장식판이 일부 떨어져 있고 화불(化佛)이나 물병과 같은 상징적 표식은 없다. 머리카락은 가늘고 긴 보계(寶髻) 형태로 양 귀를 감싸면서 세 가닥으로 나뉘어 있다. 어깨 위까지 길게 내려와 있어 장식적이다.

네모난 얼굴에 가늘고 긴 눈과 비교적 큰 코가 표현돼 경직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깨를 덮은 통견식(通肩式) 옷을 입었는데 양 옷깃이 한번 접히면서 둥근 곡선의 옷주름이 배부분까지 흘러내려와 옷 속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내의는 수평으로 입었으며 단순한 형태로 처리했다.

다리 사이 넓게 펼쳐진 옷자락과 왼쪽 무릎 위 표현된 나뭇잎 모양 옷자락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두 손 역시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댄 설법인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보살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손 모양이다.

목조아미타불좌상은 110cm 높이로 협시보살상과 거의 유사하다. 머리는 육계(肉髻)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며 중앙과 정상에 원통형과 반원형의 계주(髻珠)가 각각 장식돼 있다.

법의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식이다. 옷자락은 오른쪽 어깨 위에서 반원형으로 흘러내린 후 팔꿈치와 배 부분을 거쳐 왼쪽 어깨 위로 넘겨져 있다. 가슴 위로는 연판 모양으로 묶은 내의가 보인다. 다리를 덮은 옷자락은 중앙에서 넓게 펼쳐지며 좌우에 옷주름 몇 개가 표현돼 있다. 왼손 소매 자락은 무릎 위에 거의 붙어 있고 나뭇잎 모양 옷자락으로 마무리됐다. 두 손은 아미타불상의 특징인 설법인을 하고 있다.

정혜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전반적으로 신체비례와 얼굴, 착의법, 옷주름 표현 등에서 17세기 조선 후기의 불상과 흡사하다. 아미타불상 복장은 따로 조사한 적이 없어 조성발원문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617년 대웅전이 중창됐을 때 삼존불상도 함께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경내 선원(禪院) 뒤편에 있었던 목조 대좌 밑바닥에 ‘1725년 법당의 삼존불상을 새로 조성했다’(雍正參年 乙巳五月日 佛像三尊造成也 化士 貫印 別座 貫欽 盡□順敏)는 묵서가 있어 대웅전 아미타삼존불상과의 관련성은 확실하지 않다. 목조 대좌는 누구 것이었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소재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도난문화재라고 하면 으레 불상, 불화와 같은 불교문화재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 도난문화재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불교문화재이며, 지정되지 않은 비지정문화재도 다수이다. 이런 불교문화재들은 대부분 인적이 드문 산중에 위치한 사찰에 소장돼 있었기 때문에 효율적인 관리체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아 도난당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하지만 불상 가운데 유독 보살상과 나한상, 동자상이 도난의 대상으로 인기가 많다. 이유는 무엇일까? 석불에 비해 크기가 작고 나무로 제작되어 무게가 덜 나간다는 점이 요인이 될 수 있겠으나 아무래도 근엄한 부처상보다는 온화하면서도 친근함을 주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보살상의 경우 화려한 보관을 쓰고 그 아래로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있으며 몸에는 목걸이·팔찌 등 장식돼 있는 모습이 매혹적일 수도 있겠다. 나한상이나 동자상 역시 불교도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한 나무의 질감과 채색으로 부드럽고 예스러운 멋이 있어 우리에게는 아주 친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 조선시대 목보살상·나한상·동자상은 고미술시장에서 여전히 인기가 좋다. 구매자들이 많아 거래하기도 쉽다. 이처럼 불교문화재의 가치를 돈이나 재산 개념으로만 인식하고 은밀하게 구매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이를 훔치는 행동대원과 이를 사들이는 장물아비, 불법적인 거래를 하는 유통조직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도난 행위 역시 계속될 것이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588호 / 2021년 6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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