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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제68칙 상람시전(上藍市廛)

중생 존재 이유는 자신의 깨침 알지 못했기 때문

깨침 밝히는 데는 끝이 없고
사람 만나는 데는 다함 없어
평등한 마음 수행하는 자 중
선지식 아닌 이 아무도 없어

승이 상람초화상에게 물었다. “선재가 문수를 친견한 이후에 어째서 남방으로 행각을 떠난 것입니까.” 상람이 말했다. “수행을 하려면 입실(入室)에 의거해야 지해가 통방(通方)하게 된다.” 승이 말했다. “소마성(蘇摩城)에 도착했을 때 미륵은 어째서 도리어 문수에게 친견하라고 돌려보낸 것입니까.” 상람이 말했다. “깨침을 얻는 것에는 끝이 없고, 사람을 만나는 데는 다함이 없다.”

상람초는 홍주의 상람영초(上籃令超) 선사로서 그 계보는 약산유엄-선자덕성-협산선회-상람영초-남평왕종으로 계승된다. 본 문답에는 조사선의 수증관(修證觀)이 잘 드러나 있다. 조사선의 근본사상은 모든 중생은 사실 중생이라기보다는 이미 깨침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이다. 따라서 본래중생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조사선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에 중생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은 자신이 깨침을 본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줄을 생각하지 못하고, 수행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며,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런데 깨침을 성취하고 보면 그것은 이미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었던 것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따라서 조사선의 발심과 수행과 깨침은 온전히 자신에게서 시작되고 자신이 몸소 그것을 수행하여 자각함으로써 성취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깨침이란 깨치려는 의도적 수행의 결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유하고 있는 깨침을 그대로 확인하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유지하고 전법하여 교화를 실천하는 것일 뿐임을 긍정하게 된다. 따라서 수행과 깨침은 수행 끝에 깨친다든가 깨치기 위해 수행한다든가 하는 그러한 전후의 관계가 아니라, 이미 수행이 그대로 깨침이고 깨침은 그대로 수행의 작용일 뿐이라는 관계에 놓여 있다.

여기에서 승의 질문과 상람의 답변은 바로 이와 같은 수증관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선재동자의 구법행각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선재동자는 태어날 때 집안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진보(珍寶)가 다 출현했기 때문에 선재(善財)라는 이름이 붙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일체의 깨침을 갖추고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선재동자는 발심하여 문수보살에게 찾아가 가르침을 듣고 남방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기 때문에 일명 남순동자(南巡童子)라고 불린다.

선재동자가 남방으로 간 까닭은 아직은 자각하지 못한 까닭에 그것을 일깨워줄 수 있는 선지식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왜냐하면 수행에서 무엇보다도 제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 선지식이기 때문이다. 입실(入室)이란 제자가 스승의 방에 들어가서 문답을 통하여 수행의 경지를 점검받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지해가 통방하는 것이란 수행하는 사람의 이해가 널리 막힘이 없이 통하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자 승이 미륵은 어째서 다시 문수에게 친견하라고 돌려보낸 것인지 질문한다. 이것은 수행하는 자신이 자각하고 보면 그 깨침은 본래부터 자신에게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줄을 아는 까닭이다. 그래서 상람은 깨침을 밝히는 데는 끝이 없고, 사람을 만나는 데는 다함이 없다고 답한다. 곧 모든 것이 깨침 아닌 것이 없고 모든 사람이 그대로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습은 선재동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선재동자에서 동자라는 말은 마음이 순수하고 청정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지, 그저 동자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선재동자와 같이 분별심을 버리고 평등한 마음을 지니고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상황이 깨침으로 드러나고 다가오며 작용하고 성취된다. 문수보살이 선재동자에게 처음부터 이와 같은 이치를 일러주었다면 선재동자는 정작 남방으로 구도의 순례길을 떠났을까. 선재동자에게는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다. 수행과 깨침의 관계를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구도의 행각을 떠나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90호 / 2021년 6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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