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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들음이 없이 들음(不聞聞)

기자명 이제열

소리·형상은 거울 속 그림자와 같다

과거 스승과 소리 주제로 대화
생전 보고들은 게 없다고 답변
오랜 세월 지나 스승 말씀 이해
듣지 않는 것이 진실로 듣는 것

젊은 시절 한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스님은 무척 따스하고 자상한 성품을 소유하신 분이라 제자들을 깨우쳐 주시려고 늘 애를 쓰셨다. 어느 봄날이었다. 꽃구경도 하고 바람도 쐴 겸 몇몇 제자들과 함께 스님을 모시고 용인의 유원지를 가게 되었다. 이곳저곳을 산책하다가 큰 호수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중 스님은 불현듯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만약 너희들이 죽어서 부처님, 하느님, 염라대왕과 같은 심판자를 만났다고 가정하고, 그가 너희들에게 인간 세상에서 살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딱 한가지씩만 말해보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느냐?”

스님의 이런 질문에 우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답변을 드렸다. 어떤 제자 스님은 “스님과 봄날의 풍경을 보았으며 거기에서 소중한 가르침의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겠습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스님은 “삶과 죽음을 보았으며 세상의 괴로운 소리를 들었다고 고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스님께 “살아생전 하도 본 모습들이 많고 들은 소리들이 많아 한 가지를 골라낼 수가 없다고 말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스승님을 비롯한 일행들이 다 같이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스승님께 질문을 드렸다. “스님께서는 무엇을 보시고 무엇을 들으셨는지요? 부처님, 하느님, 염라대왕이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 나는 아무 모습도 본 게 없고 아무 소리도 들은 게 없다고 답하련다.” 스님의 이 같은 말씀에 나는 다시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도를 보시고 도를 설하시지 않습니까?”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시었다. “도는 모습이 없고 소리가 끊어졌는데 무엇을 보고 무슨 소리를 듣는다는 말이냐? 나는 세상도 도도 본 적이 없다”고 하시었다.

내가 스승과 작별한지 40년이 넘었고 그분은 이미 입적하시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의 풍경과 가르침은 세월이 한참 흘렀어도 잊히질 않는다. 어쩌면 내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그때가 아닌가 싶다. 당시 나는 스님의 이런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 어디에 형상 없는 곳이 있으며, 소리 없는 곳이 있겠는가? 눈과 귀가 열려 있으니 들어오는 것이 모습이요, 울리는 것들이 소리인데 하나의 형상도 본 바가 없고 하나의 소리도 들은 바가 없다니 당시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고 부처님의 가르침들을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하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한 소식을 한 도인이 법을 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그분도 입적하셨다) 나는 이내 그곳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예를 갖춘 후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었다. 

“어찌하여야 하나의 형상도 보지 않고 하나의 소리도 듣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도인이라는 분이 즉시 답하였다. “모습과 소리가 무슨 잘못이며 눈과 귀가 무슨 허물인가? 거울에는 본래 아무런 자취가 없으나 갖가지 물상을 비추는 법이요. 법사께서는 지금 거울에 비친 물상들을 진짜로 착각하는 것이요. 보고 들은 일체의 모습과 소리가 마음에 비친 그림자들이니 그 그림자들이 진실이 아닌 줄 알면 한 법도 본 바가 없고 들은 바가 없는 것이요, 그러니 눈과 귀를 탓하지도 말고 모습과 소리를 피하려 하지도 마시오. 다만 보고 들은 경계가 허망한 분별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니 그 분별만 몰록 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도인의 말씀을 듣고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과 같은 가벼움과 기쁨을 느꼈다. 한 순간의 만남이었지만 나에게는 잊지 못할 또 한 분의 선지식이었던 것이다. ‘문수사리순행경(文殊師利巡行經)’에 이런 말씀이 있다.

“다시는 지금부터 문수사리라는 형상을 보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그 이름을 듣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봄이 없는 것이 진실로 보는 것이고, 듣지 않는 것이 진실로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모습을 보았으며 어떤 소리를 들었는가? 거울 앞의 사람은 이미 떠났는데 거울 속에 사람의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은지?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593호 / 2021년 7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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