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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⑬ (5) 중고불교에서 중대불교에로 - 하

흥륜사 봉안된 10인 소조상 통해 신라불교 시대적 흐름 파악 가능 

흥륜사 금당 동서 벽에 각 5명씩 10명의 스님들 소조상 안치
신라10성 모신 것은 부처님 10대 제자 대응한 조합으로 추측
전래와 공인에서 화엄종 성립과 발전까지 5단계로 설명 가능

백률사석당기. 이차돈순교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백률사석당기. 이차돈순교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신라 최초 사찰 흥륜사 금당에는 ‘10성(十聖)’이라 하여 동쪽 벽에는 아도(阿道)・염촉(厭髑)・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 서쪽 벽에는 표훈(表訓)・사파(蛇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 등 10인의 소조상이 안치돼 있었다. ‘중고’와 ‘중대’ 불교사에서 중요한 인물 10인을 선정하여 ‘10성’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부처님 10대 제자에 대응한 조합이라고 추측된다. 또한 10성 가운데 최후 인물로서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과 그를 계승한 표훈을 들고 있는 점, 그리고 의상의 10대 제자와 화엄 10찰이라는 표현에서 10이라는 숫자는 화엄종의 만수(滿數, 부족함 없이 꽉 채운 수)를 의미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10성의 선정과정에 주류 종파로 등장한 화엄종의 역사의식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10성을 산정한 구체적인 사유, 동벽과 서벽으로 분류하여 열거한 순서가 어떤 기준에 의한 것인지는 유일한 자료인 ‘삼국유사’ 동경흥륜사10성조에서 일체 설명해 주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고 10성 가운데 흥륜사와 관련된 인물은 아도와 염촉 2인뿐이고, 나머지 8인의 행적에서 흥륜사와 직접적인 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10성 각자의 활동 시기와 불교 업적의 내용을 고려하면 2인씩 짝이 지어짐을 알 수 있다. 즉 눌지왕~법흥왕 시기 불교 전래와 공인과정에서의 선구자로서 아도와 염촉, 진평왕~선덕여왕 시기 왕실불교의 완성자로서 안함과 자장, 비슷한 시기 불교대중화운동의 선구자로서 혜숙과 혜공, 무열왕~문무왕 시기 불교대중화운동과 불교 사상체계 수립의 주인공으로서 원효와 사파, 문무왕~경덕왕 시기 화엄종 창립의 시조로서 의상과 표훈 등 5그룹으로 분류된다.

아도와 염촉-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래해온 인물로 전하는 아도는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 등으로 쓰이며, 행적과 시기는 일정치 않다. 김용행(金用行) 찬술의 ‘아도비’(고본수이전・해동고승전・삼국유사 인용)의 13대 미추이사금 2년(263) 전래설, 김대문 찬술 ‘계림잡전’(삼국사기 인용)의 비처(소지)마립간대(479~500) 전래설, ‘고기’(해동고승전 인용)의 법흥왕 14년(527) 전래설 등이다. 이러한 전래설 가운데 우선 주목되는 자료는 불교의 최초 전래자로서 아도를 현창하기 위하여 신라 하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도비’인데, 찬술자 김용행은 10위 관등인 대나마를 역임한 사실 이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 그러나 신라 초전불교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라는 점, 그리고 전불시대의 7처 가람터설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런데 신라불교사의 기원을 미추이사금 시대까지 소급시킨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비문을 찬술한 당시의 불교사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본다. 이 비문의 찬술 시기는 7처 가람터설이 성립되는 신라 하대가 시작되는 9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며, 불교의 초전자인 아도와 함께 공인과정에서 순교한 염촉을 현창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던 불교계의 사정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염촉은 이차돈(異次頓)으로도 불리며, 습보갈문왕의 증손이며, 법흥왕의 근신(內史舍人)으로서 불교공인과정에서 순교한 인물로 전하는데, 290년 뒤인 41대 헌덕왕 9년(817)에 국통 혜륭(惠隆) 등의 불교인과 김억(金嶷) 등의 귀족들이 염촉의 옛무덤을 수축하고 비석을 세우는 한편, 흥륜사 영수(永秀)선사의 주도로 이 무덤에 예불하는 향도(香徒)를 모아서 매달 5일에 혼의 묘원을 위해 단을 모으고 범패를 지었다. 이때 남간사의 사문 일념(一念)이 찬술한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이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다. 9세기 초반 염촉을 현창하는 분위기 가운데서 세워진 비석인 ‘백률사석당기’는 ‘이차돈순교비’ 또는 ‘이차돈공양탑’으로 불리어지며, 원래 백률사터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소장되어 있다.

안함과 자장-‘중고’ 시기 후반 왕권 강화에 기여하는 왕실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는 우선 안함과 자장을 들 수 있다. 안함(579~640과 자장(선덕여왕대)은 진골귀족 출신으로서 중국에 유학하였는데, 안함은 수문제의 불교치국책을 받아들였고, 참서를 지어 선덕여왕의 예지력을 부각시켰으며, 자장은 당 도선의 계율을 받아들여 신라의 불교교단을 정비하였다. 결국 안함은 선덕여왕대 전반기, 자장은 선덕여왕대 후반기 불교계를 대표하여 대내외의 위기로 실추된 왕권의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자장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속고승전’ ‘황룡사9층목탑사리함기’ 등 다양한 자료가 전해져 그 행적이 밝혀진 반면, 안함은 오직 ‘해동고승전’에만 전해지고 있으며, 안홍(安弘)과 혼동됨으로써 그 실체가 불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8세기 말 9세기 초 한림 설모(薛某, 薛仲業으로 추정)가 찬술한 안함비가 세워져서 고려후기 ‘해동고승전’에 일부 인용되었다. 그런데 안함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안홍이 헌덕왕 5년(813)에 수립된 ‘단속사 신행선사비’에 신행(704~779)의 방계 조상으로 등장하고 있던 것을 보아 9세기 초 안함에 대한 추앙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자장은 친당정책을 주장하여 의복제도 같은 당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게 하고, 계율을 정비하면서 교단을 통솔하였으며, 특히 왕권을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황룡사에 9충목탑을 건립하게 하는 등 ‘중고’말기에 왕실불교를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나, 김춘추가 집권하게 되면서 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9세기 이후 자장과 직접 관련이 없던 오대산신앙의 전래자로서 다시 크게 부각되었음이 주목된다.

혜숙과 혜공-왕실불교가 완성되어 가던 ‘중고’시기 후반에 출세한 혜숙은 진평왕 22년(600) 진골 출신의 안함과 함께 수나라에 유학하려고 하였던 것을 보아 원래는 귀족 출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의 승려들이 왕실이나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도성안의 큰 사원에서 최고의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데 반하여 혜숙은 시골 마을에서 숨어 살면서 교화하다가 죽은 것으로 전해졌다. 혜공은 귀족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는 노파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출가한 뒤에는 항상 조그만 사찰에 살면서 매일 미치광이처럼 술에 취하여 삼태기를 등에 지고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부궤화상(負簣和尙)으로 불렸다. 그는 진평왕대 후반부터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크게 융성되어 가던 왕실불교・귀족불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소외된 일반 평민이나 노비 같은 천민의 속으로 뛰어든 대중교화승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불교대중화운동은 신라불교의 사회적 기반을 밑으로 크게 확장시켜 불교를 통한 전체 사회구성원의 화합을 추구하는 단계로 진전시켰다. ‘삼국유사’ 이혜동진조에 의하면 원효가 여러 경전을 주해하면서 매번 혜공을 찾아 의심나는 것을 묻고, 혹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보아 원효불교의 대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원효와 사파-원효(617~686)는 경전연구와 대중교화로 신라불교사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 1700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업적을 이루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100여종에 가까운 저술을 통하여 한국불교의 사상체계를 수립하는 한편, 혜숙과 혜공의 불교대중화운동을 계승하여 신라불교의 사회적 기반을 크게 확장시킴으로써 조화와 포용이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원효의 자손은 설총(薛聰)과 설중업(薛仲業)으로 이어지면서 유학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승속(僧俗)의 세계를 넘나들었던 원효에 대한 후대의 추모 열기는 9세기 초 뒷날 헌덕왕이 된 김언승의 후원으로 고선사에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를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원효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사파는 원효의 제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 사복불언조에 의하면, 사생아로 태어나 나이 열두 살에 이르도록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지도 못하여 ‘사동(蛇童)’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장성한 이후에는 언설 너머에 있는 제법의 참뜻을 생각했고, 원효를 향해 말이 많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였다. 마침내 죽은 어머니의 시체를 업고 땅속 연화장세계로 들어갔다고 한 설화는 탐욕을 끊고 괴로움을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으로 본다. 사파는 사복(蛇卜,蛇福), 사포(蛇包) 등 다양하게 표기되었는데, 흥륜사 금당 소조상 이외에도 13세기까지 부안의 내소사에도 그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었다. ‘삼국유사’에서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경주 북쪽의 소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짓고 이름을 도량사라고 하여 해마다 3월 14일이면 점찰법을 여는 것을 항례로 삼았다”고 서술한 것을 보아 9세기 이후 그를 추모하는 불교계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의상과 표훈-의상은 당에 가서 지엄에게 화엄을 전수해 와서 부석사를 창건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신라의 화엄종을 창립한 개조로 추앙되었다. 의상의 화엄종은 화엄 10대 제자, 화엄 10찰이라는 표현과 같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리고 의상의 제자인 표훈은 의상의 손제자인 신림과 함께 최고 귀족인 김대성의 후원을 받아 불국사와 석불사를 창건하고 각각 주석함으로써 화엄종은 왕실·귀족과 직결된 불교계 주류가 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표훈은 천궁을 왕래하면서 혜공왕의 출생을 도왔다는 설화를 남길 정도로 신라 왕실과 특별한 관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삼국유사’ 경덕왕 표훈대덕조에서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고 서술한 것을 보아 화엄종의 전승, 나아가 신라불교의 발전과정에서 어떤 한계에 봉착하였고, 10성 가운데 표훈이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로서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36대 혜공왕(765~780을 마지막으로 전성기인 ‘중대’가 끝나고, 37대 선덕왕(780~785)부터 쇠퇴기인 ‘하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대는 정치 사회적인 분야에서의 쇠퇴만이 아니고 불교 분야에서도 더 이상의 사상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 실천불교인 선종이 새로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흥륜사에 소조상으로 봉안된 10성은 전성기인 중대를 지나서 쇠퇴가 시작되는 8세기말 9세기초에 이르러 지나온 270여 년간의 불교사를 뒤돌아보면서 대표적인 고승들을 현창하는 분위기에 맞춰 선정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0성을 중심으로 ‘중고’와 ‘중대’의 불교사를 정리하면 ‘중고’불교의 중심 주제는 불교의 전래와 공인(아도와 염촉), 왕실불교의 성립과 발전(안함과 자장)이고, ‘중대’불교의 중심 주제는 불교대중화와 불교사상의 체계화(원효와 사파)와 화엄종의 성립과 발전(의상과 표훈)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간 과도기의 불교로서 왕실불교의 편협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서의 선구적인 불교대중화운동(혜숙과 혜공)이 ‘중고’시기 말경 제기되어 ‘중대’로 들어가 원효에 의해서 대성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97호 / 2021년 8월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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