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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15) (6) 불교대중화운동과 일반서민의 교화 - 상

혜숙으로 시작된 불교대중화 운동으로 사회계층갈등 완화 길 열려

불교, 비약적 발전에도 왕실불교 한계…골품제 고착으로 갈등
혜숙·혜공·원효 불교대중화 노력 덕에 사회저변으로 불교 확대
대중교화과정서 미륵불과 석가불 외에 아미타불 새롭게 대두

범어사 성보박물관소장본(보물).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범어사 성보박물관소장본(국보).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신라는 24대 진흥왕대(540~576)에 병부를 강화하고 군사조직을 정비하면서 적극적인 대외팽창정책을 추진하여 낙동강유역과 한강유역으로 영역을 크게 확장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런데 26대 진평왕대(579~632)에는 대외적인 확장정책보다는 대내적인 지배체제의 정비에 주력하여 왕권강화와 중앙행정관서의 설치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어 신라 국가체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지배체제의 정비에 상응하여 골품제도라는 신분체제가 고착화되면서 지배계층과 피지배층과의 단층이 벌어지게 되었고, 지배층 안에서도 정치권력에서 탈락되거나 소외되는 인물들이 배출되는 새로운 사회모순이 발생하였다. 진평왕 9년(587)의 대세(大世)와 구칠(仇柒), 그리고 43년(621) 설계두(薛罽頭)의 해외 망명은 그러한 사회모순이 심화되는 사회상의 산물이었다. 그 가운데 대세는 나물왕의 7세손인 이찬 동대(冬臺)의 아들이었는데, 신라의 산골에 살다가 일생을 마칠 수 없다고 하여 남해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보아 신라 왕족인 진골 출신이었으나, 신라에서의 생활에 불만을 품고 중국 강남지방으로 망명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설계두는 신라의 사대부의 자손이었다는 ‘삼국사기’ 설계두전의 기록을 보아 가문의 신분보다는 학문이나 능력으로 출세를 모색하는 진골 아래의 신분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데 골품을 따지므로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도를 넘지 못한다”고 불평하면서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한편 진평왕은 자신과 형제, 부인의 이름을 모두 인도 석가족의 이름인 백정(白淨)・백반(伯飯)・국반(國飯)・마야부인(摩耶夫人)・승만부인(僧滿夫人) 등으로 이름을 지음으로서 부처의 가족에 의제시켜 신성가족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신체가 장대하였음을 부동석(不動石)의 설화로 전승시켰고, 교사나 종묘 제사 때에 사용하던 옥대를 천제(제석)가 내려주었다는 설화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등 왕권의 신성성을 과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진평왕대는 지명(智明)・원광(圓光)・담육(曇育)・안함(安含) 등 유학승을 수와 당에 연이어 보내어 선진 불교를 수입하여 신라불교 발전의 기반을 구축하였는데, 특히 원광은 ‘삼국유사’ 원광서학조에서 중국 유학승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특기되었다. 원광은 귀국한 뒤에 이른바 세속오계라는 새로운 윤리덕목을 제시하고, 황룡사에서 대승경전을 강의하였으며, 수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찬술하는 등 승려로서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각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중국 남조인 진(陳)의 불교를 받아들인 원광은 왕권의 신성화나 국가의식의 고취를 위주로 하는 당시 불교계 상황에서는 다소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평왕 30년(608) 고구려를 치려고 수에 군사를 요청하는 걸사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은 원광은 “자기 살기를 구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로서의 행동이 아니다”라고 고민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 정치권력에 예속된 북조불교의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에는 다소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속고승전’에 의하면 “나이가 많아서는 수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가고, 의복과 약과 음식 등을 모두 왕이 손수 마련하여 좌우에서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복을 독차지하려고 하였다”고 하며, 또한 진평왕 52년(630) 원광이 황룡사에서 입적하여 장사지낼 때에는 “나라에서 우의(羽儀)와 장례도구를 내려 왕의 예식과 같이 하였다”고 기록한 것을 보아 최고 귀족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광은 신라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일반 서민층에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뿐이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속고승전’은 서민들에게 비친 원광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설화의 형태로 전해주고 있다. “(원광이 죽은 뒤에) 죽은 아이를 낳은 한 속인이 있었는데, 그곳 속설에 유복한 사람의 무덤에 아이를 묻으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곧 그 무덤 곁에 묻었더니, 당일에 그 태아의 시체에 벼락이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져버려졌다. 이로 인하여 (원광에게) 공경의 마음을 품지 않았던 사람들도 모두 숭앙하게 되었다.”

진평왕대 불교의 커다란 발전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신앙대상은 왕실이나 일부 귀족층에 국한된 것이었고, 일반 서민들은 감화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불교는 왕권의 신성화나 국가의식의 고취를 위주로 하는 것이었고, 일반 서민까지 아우르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행복을 증장시키는 불교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불교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지배체제의 정비에 따른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심화시키는 역할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신라의 사회구성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국가의식과 정신적 지주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일반 서민을 신앙대상으로 확대하는 불교대중화의 문제가 시대적 과제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불교발전을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을 위해서도 시급히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진평왕대부터 불교대중화를 시대적 과제로 삼은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선구적인 인물이 진평왕대의 혜숙(惠宿), 그를 계승한 선덕여왕대의 혜공(惠空)이었다. 혜숙과 혜공은 신라불교사 전성기를 막 넘어선 9세기 초반 그 때까지의 자국의 불교사를 되돌아보면서 대표적인 인물로서 선정된 10인 가운데 포함되었는데, 고려말기 일연(1206~1289)이 찬술한 ‘삼국유사’ 의해편에서 2인을 묶어 “혜숙과 혜공이 속세를 같이 하다(二惠同塵)”라는 조목으로 설정한 것은 신라불교사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의 소산이라고 본다. 왕실불교의 전성기인 ‘중고’시기 후반에 생존한 2인의 불교대중화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일연이 높이 평가한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불교대중화운동의 최초 인물인 혜숙의 생몰 연대와 출신 가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해동고승전’ 안함전에 의하면, 진평왕 22년(600)에 안함(579~640)이 혜숙과 친구가 되기를 약속하고, 중국 유학을 목적으로 뗏목을 타고 이포진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되돌아 왔다고 하는데, 안함의 속성이 김 씨로서 시부(詩賦) 이찬의 손자였다는 것을 보아 신라 왕족인 진골 귀족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혜숙과 친구가 되기를 약속하였다는 것은 두 사람이 맹우관계(盟友關係)였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혜숙도 안함과 같이 진골 귀족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안함은 다음 해(601)에 왕의 교지를 받아 수나라에 유학하고 진평왕 27년(605)에 귀국하여 왕실불교의 발전에 기여한 반면, 혜숙은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불교대중화운동을 전개함으로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혜숙은 일찍이 호세랑(好世郞)의 낭도로 있다가 호세랑이 화랑에서 물러나게 되자 안강의 적선촌(赤善村)에 은거하였다. 20여 년이 지났을 때에 당시의 국선 구참공(瞿旵公)이 그 근처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혜숙은 사냥에 동참하여 같이 즐기다가 자기 살을 베어서 국선의 잔인한 행위와 어질지 못한 마음을 깨우쳐 주었다. 뒤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진평왕이 사자를 보내어 맞아오게 하였으나 혜숙은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그대로 시골에 머물러서 교화하다가 죽었는데, 생사가 자재하였다는 설화를 남겨주었다. 고려말기 일연 당시에는 안강현의 북쪽에 혜숙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혜숙이 살던 곳이라고 하며, 또한 부도도 있었다고 한다. 혜숙사는 혜숙이 창건한 미타사(彌陀寺)로 추정되는 것을 보면 대중교화의 신앙 내용이 아미타신앙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상의 혜숙의 대중교화활동 가운데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는 2개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교화의 장소와 대상의 문제이다. 당시의 승려들은 최고 지식인으로 왕실이나 귀족을 교화대상으로 하여 흥륜사나 황룡사 같은 도성 안의 커다란 사찰에서 최고의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다. 진평왕대 중국에 유학한 지명(智明)과 원광(圓光)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 지명은 진평왕 7년(585) 진에 유학을 가서 24년(602) 입조사 상군을 따라 귀국하였는데, 진평왕은 그의 계행(戒行)을 존경하여 대덕(大德)을 삼았으며, 원광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황룡사나 왕궁을 무대로 하여 최고의 귀족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혜숙과 친구 되기를 약속하였던 안함(安含)도 수에 유학하고 돌아온 뒤 선덕여왕대 왕권의 신성화에 기여하였다. 그런데 혜숙은 스스로 시골 마을에 숨어 살면서 진평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화로운 도성의 사회에서 귀족신분으로 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시골 마을에 숨어살면서 서민들을 상대로 한 교화활동으로 일생을 보냈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왕실불교 귀족불교의 테두리를 박차고 화려한 생활에서 벗어나 불교의 교화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던 시골 서민사회 속으로 뛰어든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위라고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혜숙으로부터 시작된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화활동은 뒷날 혜공을 거쳐 원효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들의 교화활동은 결과적으로 신라불교의 사회적 기반을 아래로 확대시키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지배체제의 정비에 따른 사회계층 사이의 심화되는 괴리와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길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혜숙의 교화활동에서 둘째로 주목되는 사실은 교화내용으로 아미타불의 정토신앙이 새로 제기된 점이었다. 신라 최초 사찰인 흥륜사의 본존불은 미륵불이었고, 최대 사찰인 황룡사의 본존불이 석가불이었던 것을 보아 당시 가장 중요한 신앙대상 부처는 미륵불과 석가불이었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랑은 미륵불의 화신으로 받들어졌으며, 또한 미래 세상에 미륵불과 짝을 이루어 등장하게 된다는 전륜성왕이 왕권강화를 서두르던 국왕의 이상적인 제왕상의 모델로서 받들어졌다. 오늘날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미륵불과 석가불의 관계를 국왕과 귀족세력의 관계에 직접 대입시켜서 부처에 대한 신앙을 정치세력의 대립과 타협의 논리로 해석하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는데, 이것은 불교신앙을 잘못 이해한 결과일 뿐이다.

미래불인 미륵불과 과거불인 석가불은 상호 보완 관계로서 결코 현실 정치세력인 국왕과 귀족세력의 대립과 타협의 논리가 될 수 없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미륵불과 석가불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혜숙으로부터 시작된 대중교화운동에서 특히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미륵불과 석가불 이외에 새로운 신앙대상으로 아미타불이 등장한 것이었다. 중대 이후 사찰에서는 미륵불과 함께 아미타불을 함께 봉안하는 것이 일반화되는데, 특히 아미타불은 귀족층만이 아니고 일반 서민이나 노비층에 이르기까지 가장 널리 신앙되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99호 / 2021년 9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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