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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제77칙 양산도량(梁山道場)

형상 통해 형상이 없는 이치를 깨우치는 것은 순리

무상도량 이치 묻는 대양에게
관세음보살 그림으로 일깨워
깨침을 언설로 전승함도 중요
못하면 벙어리가 꾼 꿈과 같아

대양명안 화상이 양산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무상도량(無相道場)입니까.” 양산이 관음보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오처사(吳處士)가 그린 것이다.” 대양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양산이 갑자기 입막음을 하고 말했다. “저것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형상이 없는 것은 어떤 것인가.” 대양이 언하에 깨쳤다. 이에 예배를 드리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거기에 서 있으니, 양산이 물었다. “어째서 일구도 말하지 않는가.” 대양이 말했다. “말씀드리는 것은 사양하지 않겠지만, 그 말이 지묵에 오를까 저어됩니다.” 양산이 껄껄 웃고 말했다. “그 말은 돌비석에 오르겠구나.” 이후에 그 말이 과연 비문에 올랐다.

대양은 중국 조동종의 제6대 조사로서 그 법맥은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운거도응(雲居道膺, 835~902)-동안도비(同安道丕)-동안관지(同安觀志)-양산연관(梁山緣觀)-대양경현(大陽警玄, 943~1027)으로 계승되었다. 형상을 통해서 형상이 없는 이치를 깨우치는 것은 순리에 속한다. 그리고 형상이 없는 이치를 통해서 형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순리에 속한다. 대양은 무상도량(無相道場)의 이치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무상도량은 형상을 초월한 도량으로 경전이나 어록을 가리키기도 한다. 양산은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걸어둔 족자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무상(無相)의 이치를 일러주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형상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그 그림을 통해서 그동안 공부해온 관세음보살에 대한 생각을 떠올림으로써 당사자에게 관세음보살에 대한 가르침이 전해지는 이치를 일러주고 있다. 그러나 오처사가 그려놓은 관세음보살에 대하여 대양은 그것은 한낱 그림에 불과한 것으로 무상도량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양산은 이미 그와 같은 대양의 마음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대양이 입을 열어 말하려는 것을 제지하였다. 그 까닭은 대양이 관세음보살의 이미지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떠올리고 있던 바로 그 관념이야말로 벌써 유상도량(有相道場)에 얽매이고 만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양에게 ‘저것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형상이 없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이에 대양은 그림으로 그려진 관세음보살의 형상에 더 이상 얽매이지 말라고 입막음했던 양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 찰나에 대양은 언하에 깨쳤지만 자기의 심정을 그 어떤 언설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예배를 드리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거기에 서 있을 뿐이었다.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는 제스처를 통해서 대양 자신은 본분자리를 터득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양산은 그와 같은 대양의 마음을 진즉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일구도 말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고 있다. 이것은 대양 그대가 깨친 이치를 그대로 묻어두지 말고 어떤 식으로든 드러내어 설파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애써 일러준 것이다. 대양은 자신에게 노파심절한 양산의 의도를 파악하고 ‘제가 깨친 이치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칫 그 답변이 훗날 어록 내지 후배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제서야 양산은 대양의 깊은 속내를 인가라도 해주듯이 그저 껄껄껄 웃어보였다. 그리고 양산은 제자의 선기에 대하여 ‘그와 같은 그대의 언변이야말로 훗날 돌비석에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고 평가해주었다.

선의 목표는 뭐니뭐니해도 깨침의 경험이다. 나아가서 그 깨침을 언설로 표현하여 전승해주는 것 또한 깨침에 못지않게 중요한 경험이다. 따라서 깨침이 절반이라면 그것을 타인에게 설법해주는 것 또한 절반에 해당한다. 깨쳤으면 반드시 언설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하면 마치 벙어리가 꾼 대단한 꿈과 진배없다. 그래서 깨침이란 언설로 드러나기 이전에는 아직 진정으로 깨친 것이 아니다. 깨침은 언설로 말미암아 비로소 깨침이 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다름이 아니라 달과 차이가 없다. 양산은 바로 이와 같은 이치를 대양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99호 / 2021년 9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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