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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탈종교 시대와 불교 (2)

서양 종교 관념에 갇혀 불교 이해해선 안돼

서양 전통서 온 종교 개념과 한국인이 가진 종교 관념은 달라 
연대 강조하는 서양 종교는 신자, 비신자 나누는 배타성 가져
탈종교 시대, 소속 원찰과 신도증 추구하는 제도는 맞지 않아  

왼쪽은 남양주 봉선사의 ‘관세음보살상’, 오른쪽은 서울 혜화동성당의 ‘성모상’. 모두 최종태(1932~) 조각가의  작품.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제공
왼쪽은 남양주 봉선사의 ‘관세음보살상’, 오른쪽은 서울 혜화동성당의 ‘성모상’. 모두 최종태(1932~) 조각가의  작품.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제공

종교(religion)라는 명사(名詞)는 근대초기 불교에 덧씌워진 명칭입니다. 마치 우리 식단을 서양식단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난처해지는 일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을 스프라고 불러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반찬은 우리 식단에서는 말 그대로 ‘밥과 더불어 먹는 음식’이지만 서양식단에서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합니다. 에피타이저(appetizer)라 할 수도 없고 메인 디시(main dish)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반찬을 ‘사이드 디시(side dish)’라 번역하는 경우도 봅니다만 반찬의 의미와 역할에 합당한 명칭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불교가 ‘종교’라는 범주에 들어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여러 인식론적 문제들을 이 글에서 다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종교전통에서 의미하는 종교, 즉 ‘religion’은 우리가 종교라는 용어로 이해하는 내용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religion은 연대(連帶)와 연결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강한 응집력을 전제로 하는 커뮤니티의 형성과 유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도시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유럽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중심은 곧 종교 공동체였고 이교도는 교화의 대상이거나 배척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식구 내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종교란 한 식구, 한 마을에 속한다는 일종의 멤버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종교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정체성’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 가족 그리고 한 마을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이 멤버쉽을 확인 하고 유지하는 것은 교회에 ‘가느냐’ ‘가지 않느냐’로 결정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가야만 멤버쉽이 확인 되는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계에서 일요일 교회에 가는 신도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두고 ‘탈종교’라고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의 경우, 특히 불교의 경우를 보면 일년내내 절에 가는 일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불교인이라 자처하는 분들도 많고 반대로 불교인이 아니면서도 절을 찾아 쉬기도 하고 며칠 씩 머무르기도 합니다. 절에서도 ‘당신 불교인이야’라고 묻는 일도 없습니다. 불교는 멤버쉽에 기반한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통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절에 가지 않아도 스스로 불제자임을 자처했고 절에 계신 스님들도 불교신도들만을 골라 반기는 일은 없었습니다. 해방이후 한국사회에서 급격하게 성장해온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와 경쟁하는 가운데 종단에서는 교회의 신자 관리를 벤치마킹해서 ‘원찰’제도다 ‘신도증’이다 등의 멤버쉽 중심의 포교활동을 해왔지만 제가 알기로 별 성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불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은 종교를 ‘성인의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연대와 연결을 의미하는 서양의 종교 관념은 필연적으로 ‘안’과 ‘밖’, ‘신자’와 ‘비신자’ 등 배타적 성격을 갖게 됩니다만, ‘성인의 가르침’으로서 종교를 이해하는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는 개인의 선택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서양의 경우 종교를 개인의 선택이라고 이해한 역사는 근대 이후이며 그 조차도 서양인들에게는 어렵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제 서양친구들 중에서 한국문화를 좀 아는 친구들은 한국인들은 가족 내에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놀랍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저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되는 것이죠.

2014년 한국갤럽에서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실태 조사’를 보면 한국인의 종교인식이 잘 드러납니다. “종교를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한국 종교인구의 70%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10%),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60%)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이유는 ‘복(건강, 재물, 성공 등)을 받기 위해’(15%) ‘죽은 다음의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서’(14%)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종교 관념은 다른 나라 특히 기독교 중심의 서양의 종교 관념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앞 서 연재에서 미국인의 27%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는’ 소위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이라고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오늘날 미국인들은 ‘마음의 평안’과 ‘삶의 의미’를 위해 ‘교회’라는 ‘집단’을 떠나 ‘개인’의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한국 종교인구의 70%가 종교를 갖는 이유를 ‘마음의 평안’과 ‘삶의 의미’에서 찾는다고 하는 것은 탈종교 시대 불교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한국불교의 모습이 이러한 요구에 잘 부응하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물론 종교가 대중들의 요구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대중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뒤집어서 본다면 그들의 ‘고통’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디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허덕대거나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정신 안정을 위한 약물은 오용 남용되고 있고 삶의 의미는 스펙 쌓기에 가려 찾아보기 힘든 지경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가르치는 것은 고통과 그 고통의 소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고통의 소멸은 불교의 시작이자 마지막입니다. 불교의 존재이유와 목적이 거기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탈종교 시대의 윤리에 대해 언급하면서 “도덕의 의미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하라리의 이 언급을 ‘표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오늘의 맥락에서 잘 설명해 주는 훌륭한 주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03호 / 2021년 10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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