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한국불교가 처한 특수한 상황으로 다불교(多佛敎) 현상의 여러 문제점을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러나 다불교적 상황은 한국불교의 새로운 기회도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과거와 달리 오늘날 세계는 고립적으로 발전했던 다양한 지역불교 전통들이 함께 소통하고 공존하면서 새로운 불교의 역사를 써 나가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한국불교는 이러한 세계불교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불교가 맞고 있는 상황을 잘 이해하면서 21세기 새로운 교판과 교학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한국불교는 21세기 세계불교를 위한
한국불교(Korean Buddhism)인가, ‘한국의 불교’(Buddhism in Korea)인가?외국의 불교학자나 불교계 인사들이 한국불교에 대해 물으면 꼭 반문하는 질문입니다. 그 분들은 한국인들이 믿는 불교는 당연히 한국불교일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국사람들은 태국불교를 티베트 사람들은 티베트불교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오늘날 한국 불교인들의 수행과 신행활동, 불교문화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불교에 관한 지식의 습득 경로와 내용을 보면, 지금 한국의 불교는 선종(禪宗)을 표방하는 ‘조계종’이라는
지난 글에서 발트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세속에서 메시아 찾기’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메시아를 찾는 일이 근대 이전의 기독교적 전통에서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성(聖)과 속(俗)을 확연히 구분하기 때문입니다.유럽의 성당이나 수도원의 건축물들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당(聖堂)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장소로서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성당 안을 들어가 보면 기독교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저절로
지난 글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원심력이 ‘탈중심적’ 변화와 확산의 힘이라면 구심력은 ‘중심’을 향한 집중의 힘을 상징합니다. 부처님오신날의 연등과 성탄절의 크리스마스트리는 두 종교의 이러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그 꼭대기에 별을 달고 불을 밝히듯이 하늘을 향해 집중하는 모양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사용하는 방식 또한 ‘중앙집권적’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한 장소에 하나가 놓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이나 미국의 워
탈종교와 관련한 지난 두 번의 연재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표하시고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글쓴이로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제 소견이 우리 모두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는 것에 책임감도 느끼게 됩니다. 모쪼록 저의 제안들이 대중지성과 공론의 장을 통해 더욱 연마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글에서는 탈종교 시대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불교의 가능성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불교는 그 출발에서부터 ‘탈종교’ ‘탈 중심’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사회는 바라문교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사회였습니다. 신(神)중심의
종교(religion)라는 명사(名詞)는 근대초기 불교에 덧씌워진 명칭입니다. 마치 우리 식단을 서양식단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난처해지는 일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을 스프라고 불러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반찬은 우리 식단에서는 말 그대로 ‘밥과 더불어 먹는 음식’이지만 서양식단에서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합니다. 에피타이저(appetizer)라 할 수도 없고 메인 디시(main dish)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반찬을 ‘사이드 디시(side dish)’라 번역하는 경우도 봅니다만 반찬의 의미와 역할
그간의 연재에서는 인문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부처님의 삶’(佛)과 ‘가르침’(法)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9월부터의 연재에서는 주로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승가(僧伽)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승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금·여기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개방적 공동체를 뜻합니다. ‘개방적’ 공동체라 함은 전통적인 승가의 구성원이라 일컫는 비구·비구니·우바이·우바새 등 남녀 출재가 불교인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굳이 전통적 불교승가의 구성원인 사부대중을 넘어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대승보살의 결정적 중요성은 이타(利他)로써 자리(自利)하는 삶, 다른 이들을 치유함으로써 스스로 치유하는 삶의 등장이다. ‘바즈라드흐바자(Vajradhvaja)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보살은 (다음과 같이) 결심한다: 모든 고(苦)의 짐을 내가 짊어지겠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견뎌낼 것이다 … 그리고 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모든 존재의 짐들을 짊어져야 한다 … 나는 이 세상 만물을 생로병사 윤회의 공포로부터 구출해야만 한다. [‘Conze et. al. trans’, 19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롤스의 사회정의론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도덕 무관심적인 이성주의는 불교의 세계관이나 윤리관과는 대단히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각을 더 진전시켜 보면 놀라운 관련성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과 공동체 내에서의 개인의 위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불교의 무아설은 ‘사회적 동력’ 즉 자아에 대한 확장된 해석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무아설을 상즉상입(相卽相入, mutual penetration)하는 연기적 관점에서 보자면 각각의 자아는 다른 모든 자아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것은 롤스와의 재
참여불교는 서양의 침탈과 피식민 경험 그리고 전쟁·가난·불평등 등과 같은 현실 인식에 기반하고 있지만, 사회적 참여를 위한 불교적 관점의 이론적 틀을 제공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참여불교인들의 나이브(naive)한 현실 인식이나 사회과학적 지식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내면적 변화를 통해서 개인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종교로서 불교가 갖는 고유한 특성에 기인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불교에만 해당하는 독특한 것은 아니다. 모든 종교는 개인의 구원과 사회 참여의 요구들을 조화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이
자본주의의 시장경제체제는 이윤추구라는 개인의 이기심에만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기적 욕망이 지적 호기심, 도덕적 열정과 헌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타심 등과 함께 어우러져 작동하면서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추동력을 제공해 왔다. 그러나 20세기를 거쳐 오늘날, 자본주의가 세상을 더 낫게 만들 것이라는 믿음은 크게 약화되거나 이미 사라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오늘날 자본주의는 “와인을 증류해서 알코올만 추출한 그라빠(Grappa)”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라빠엔 와인이 주던 아름다운 색깔도 풍미도 사라지고 우
불교의 최고선인 열반에 이르는 과정에서 ‘감수작용’[受]에 대한 통제는 필수적입니다. 이 ‘통제’란 궁극적으로, 고·락·불고불락 모든 감수작용을 버리는데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경전에서는 “눈 등의 감각기관과 더불어 촉으로 일어나는 쾌·불쾌 혹은 중성적 감각 모두를 버려야 한다”고 하며 그런 감각들을 버리고 포기하는 한 방법은 명상을 통해 지각의 과정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수(受)의 본질에 대해 수행하는 한 명상법이 ‘대념처경’에 잘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호흡에 전심으로 집중할 수 있고 그런 수행
오온설은 경험(혹은 존재)을 해체·분석한 것으로 ‘경험’의 구성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지 지각(知覺)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계기적 순서에 따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간적·계기적 순서에 따른 지각의 과정에 대한 불교적 이해는 십이연기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렇다면 하나의 경험을 예로 이 오온설에 따른 지각의 과정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나무를 보고 있는’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1) 눈이 앞의 어떤 물질[색]을 감지한다: 색온2) 지각된 ‘색/물질’의 ‘형태’와 ‘색깔’ 등은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적
지난 연재에 이어 오늘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온[五蘊]의 두 번째 수온(受蘊)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대부분의 불교 개론서에서는 수(受)온에 대해 ‘느낌’(feeling)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각과 판단’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할 때 수(受)는 느낌이 아니라 ‘감수(感受) 작용’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합니다. 감수(感受, sensation)란 “외부 세계의 자극을 6근(根)이 받아들이는 일”을 뜻하는 말로서 통상적 의미의 ‘느낌’과는 다릅니다. 느낌이란 “몸의 감각이나 마음으로 깨달
‘금강경’은 현대 한국 조계종의 소의경전(所衣經典)일 뿐만 아니라, 일반 불교도들 간에도 가장 애송되는 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 경전입니다. 현대 한글 역으로 출판된 번역도 30여 종이 넘으며 학술적 번역이 아닌, 사찰이나 재가불교 단체에서 일반신도들을 위해 번역한 것과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고 있는 번역 등을 합치면 100종은 쉽게 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四相)에 대한 번역은 그야말로 제각각이어서 도대체 이러한 번역으로 사상(四相)에 대해 무엇을 이해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
지난번 연재 글에서 불교교리는 존재와 사물에 대한 추상화의 산물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직접 고찰이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아울러 여기서 경험이란 뇌 속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바깥세계와의 교류의 산물이라는 점 또한 강조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경험을 우리는 ‘지각’ 그리고 ‘인지’라고 부릅니다. 이 지각과 인지를 통해 우리는 바깥세계와 교류하면서 매번 새롭게 창발됩니다. 매번 새롭게 ‘창발 되는 나’가 곧 무아에 대한 생활 세계적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활 세계’란 일상적 삶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일상적
그간 부처님 출현의 문명사적 의미를 중심으로 삼보(三寶)의 첫 번째인 불(佛)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연재부터는 삼보의 두 번째인 법(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불교는 ‘가르침’을 그 중심에 놓고 있는 종교입니다. 철학적 종교 혹은 이법(理法)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와 같은 계시의 종교가 ‘믿음’을 신앙의 핵심으로 한다면 불교는 ‘가르침’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불교에 입문한다는 것은 곧 삼법인, 연기법, 사성제 등 불교의 기본교리를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간 불교를 공부하고 또
지난 연재에서 부처님의 출현은 신(神)중심적 세계로부터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강조하는 인문적 세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종교행위의 중심이 ‘제사’로부터 ‘수행’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바라문교를 공고히 뒷받침하고 있던 사제주의를 폐기하는 일이었습니다.사제주의란 신과 인간을 매개하고 신을 대리한다는 사제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 바라문은 혈통에 의한 세습적 사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높은 영적·정신적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로 ‘바라문’이란 용어를 사용
부처님께서 태어나서 활동하던 기원전 5~6세기 인도사회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우선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농업에 철기가 사용됨으로써 자급자족을 넘어 잉여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갠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상당한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었고 전통적으로 유목민이었던 바이샤들이 점차로 농민 그리고 상인계층으로 자리를 잡게 되던 시기였습니다. 이와 함께 종교·문화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자유사상가라 불리는 사문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이들은 수백 년을 넘어 이어오던 베다의 종교적 권위를
고행은 부처님 당시 사문들만의 수행법은 아니었습니다. 베다 전통에서 고행을 뜻하는 ‘타빠스’(tapas)란 고행에 의해 축적되는 영적인 힘을 의미했고, 기원전 700년경 초기 우파니샤드 시기에 이르러 해탈에 필요한 자기 통제와 영적인 힘을 성취하고자 고행은 반드시 필요한 수행법으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고행은 부처님 당시 인도 종교문화 전통에서 바라문과 사문 모두에게 해탈을 위한 필수 수행법의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부처님이 고행을 버렸음은 인도의 오랜 통념에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인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