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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탈종교시대와 불교

찬란한 과거 얽매이는 순간 ‘불교 미래’ 사라진다

한국불교가 민족문화 정수 맞지만 우울한 ‘현재’도 직시해야
절이라는 장소, 출가라는 제도, 과거 중심적 사고서 벗어나고
문중·가풍 전통 고착서 한 걸음 나아가야 한국불교 미래 있어 

지난 글에서 발트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세속에서 메시아 찾기’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메시아를 찾는 일이 근대 이전의 기독교적 전통에서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성(聖)과 속(俗)을 확연히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성당이나 수도원의 건축물들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당(聖堂)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장소로서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성당 안을 들어가 보면 기독교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저절로 신심이 우러날 만큼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높은 천정의 아름다운 조각들 그리고 자연채광을 차단하는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인간세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느님 세계’의 아름다움입니다. 육중하고 커다란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성당 내부의 성스러운 세계는 인간들의 세속과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수도원은 높은 담장을 쌓아 올려 ‘안’과 ‘밖’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몇몇 곳에도 있는 봉쇄수도원(cloistered monastery)은 말 그대로 ‘봉쇄된’ 곳이며 건축물의 구조 자체가 폐쇄적이어서 바깥세상과의 연결과 소통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KBS1TV에서 방영된 ‘다큐인사이트 세상 끝의 집-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방송화면 캡쳐. 

한편 우리의 불교 사찰은 어떠합니까? 일주문은 그 이름이 ‘문’일 뿐 실상 문이 아닙니다. 사찰과 바깥을 대략적으로 구분하는 상징적 표식일 뿐입니다. 사찰에는 담이 없어 어디부터, 또 어디까지가 사찰인지도 애매합니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은 ‘늘’ 열려있습니다. 흔히 절은 산에 있어 세상과 고립된 것처럼 말들 하지만 실상 절은 개방적 공간입니다. 말하자면 교회나 성당은 시내에 있지만 실상은 안팎이 구분된 폐쇄적 공간이라면 절은 산에 있을 뿐 안팎의 구분이 없는 공간입니다.

탈종교의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종교를 떠나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유물주의로 살겠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봅니다. 지난 연재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한국인들이 대부분은 종교를 통해 삶의 의미와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합니다. 메시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 메시아를 찾고, 절 안에서만 부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절 바깥의 일상공간에서 부처님을 찾고자 하는 것이 탈종교의 문명사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종교’ 밖에서 종교를 찾고 불교 밖에서 불교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러하셨듯 그 시작에서부터 종교 밖의 종교였으며 2500여년 불교사는 불교의 의미를 끊임없이 확장해온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부산 범어사 일주문(조계문).
보물로 지정된 부산 범어사 일주문(조계문).

우리는 부처님을 ‘대웅전’에만 가두어 놓지 않았습니다. 경주 남산의 마애불이 그러하거니와 심지어 산과 계곡과 같은 자연세계에서도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설악산 천불동 계곡에는 말 그대로 천불(千佛)이 계신 곳입니다. 한반도의 산 이름들인 보현, 문수, 반야, 금강 등등은 불교적 이름들이며 서울 근교의 안양(安養)은 아미타불의 정토에서 따온 지명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과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 불교의 영광을 회고하거나 되찾아야 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교라는 종교의 원심력 그리고 불교 밖에서 불교를 찾고자 했던 선배 불교인들의 ‘상상력’을 되살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불교를 성스러운 특정 장소에 국한 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으로 스며들게 하였던 상상력, 불교의 안과 밖을 구획하고 구분하지 않았던 개방성이 오늘날 탈종교 시대에 더욱 더 절실하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불교 고유의 원심력 그리고 한반도의 선배불교인들의 상상력을 오늘날 탈종교 시대에 다시금 되살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먼저 다음의 세 가지 ‘중심’을 해체해야 합니다. 먼저 ‘절’이라는 지리적 공간을 중심으로 불교를 사유하는 것, 둘째 ‘출가’라는 제도를 중심으로 불교를 사유하는 것, 마지막으로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과거’를 중심으로 불교를 사유하는 것을 해체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체란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잘 활용해야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 가지 모두를 설명 드리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것 같아 ‘과거’를 중심으로 불교를 사유하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지만 거울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과거’는 우리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지만 ‘과거’로 돌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거개가 다 ‘과거’에 관한 것입니다. 불교가 자랑스러운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위대하고 그 분의 가르침이 위대하여서입니다. 한국불교가 자랑스러운 것은 원효, 지눌과 같은 위대한 선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불교가 민족문화의 정수임을 자랑하는 것은 신라와 고려의 찬란한 유물이 불교문화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는 어떻습니까? 과거가 자랑스럽듯이 지금 우리의 현재 또한 그만큼 자랑스러울까요? 과거를 자랑하듯 지금 한국불교의 현재를 자랑스러워하는 불교인이 많을 때 우리 한국불교의 미래 또한 밝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칫 ‘화려한 과거’는 지금 우리의 ‘우울한 현재’를 직시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불교를 ‘과거 전통’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불교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신행과 나의 불교 이해는 지금 여기의 ‘현재’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전과 과거 수행자들의 일화는 우리를 비추어주는 거울이며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등불이자 모범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불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거는 우리가 숭상만하거나 모방할 내용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계승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불교가 스스로 유폐하고 있는 ‘과거’의 사례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문중’이라는 과거입니다. ‘문중’ 혹은 가풍이란 동아시아불교에서 독특한 전통입니다. 여기에는 공동체적 가치를 확인케 해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개체의 공간적 확장이자 시간적 확장을 통해 ‘우리’ 그리고 ‘현재’의 연원을 확인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불교의 경우 문중의 의미가 과거 전통의 고수를 의미하고 과거를 고착화하는 것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나’라고 하는 주체성은 사라지고 문중이라는 집단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라고 하는 나의 문제의식은 ‘과거’에 기반한 집단의식, 즉 문중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해는 “석가가 중생의 님이 아니라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불교가 왜 우리에게 소중한지를 잘 설파하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탈종교, 불교 밖에서 불교를 모색해야하는 지금 우리가 다시금 되새겨봐야 할 경구가 아닌가 합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09호 / 2021년 11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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