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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락중도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하여 ②

고행의 무익함 알린 중도는 인류 문명사적 가치

해탈에 이르려면 행복 피하고  고통 견뎌야 한다는 게 당시 통념
하지만 부처님은 고행 추구하지 않고 선한 행복감 배척하지 않아
소욕지족으로 일상 살아가는 게 바로 고락중도의 실천적 의미 

남인도 타밀나두 마말라푸람의 가네쉬 라타 언덕에 부조된 ‘아르주나의 고행(Arjuna's Penance)’. 힌두교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인 아르주나가 고행을 하고 있다.
남인도 타밀나두 마말라푸람의 가네쉬 라타 언덕에 부조된 ‘아르주나의 고행(Arjuna's Penance)’. 힌두교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인 아르주나가 고행을 하고 있다.

고행은 부처님 당시 사문들만의 수행법은 아니었습니다. 베다 전통에서 고행을 뜻하는 ‘타빠스’(tapas)란 고행에 의해 축적되는 영적인 힘을 의미했고, 기원전 700년경 초기 우파니샤드 시기에 이르러 해탈에 필요한 자기 통제와 영적인 힘을 성취하고자 고행은 반드시 필요한 수행법으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고행은 부처님 당시 인도 종교문화 전통에서 바라문과 사문 모두에게 해탈을 위한 필수 수행법의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부처님이 고행을 버렸음은 인도의 오랜 통념에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인도에서 고행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잘못된 생각에서 출발됐습니다. 

하나는 일상적 자아와 구별되는 궁극의 자아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체 업을 소멸하는 게 곧 해탈이라는 생각입니다. 전자의 경우, 육신을 가진 일상적 자아와 구별되는 궁극적 자아(아트만·我, 지바·命我)를 발견하기 위해 고행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후자는 축적된 업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육신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고행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여섯 외도의 하나인 니간타(후일 자이나교)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들에게 고행은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혼의 청정을 위한 수행의 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이나교 수행자를 비롯한 당시 사문에겐 ‘행복은 고통을 통해서만 얻어 진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고행을 하셨던 시기를 회상하며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나는 ‘행복은 행복을 통해 얻어지지 않고 고통을 통해 얻어 진다’고 생각했다”고 하신 바가 있습니다.

‘고행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었다’는 부처님 회상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의 경험과 구별되는 궁극적 자아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불교의 핵심 교리가 되는 무아론과도 연결됩니다. 

‘인도인의 길’을 저술한 존 콜러(John M. Koller)의 말을 빌리면 “육신을 고문한다고 영혼이 해탈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갇힌 영혼’이란 생각은 인도종교문화의 오랜 통념일 뿐 아니라 기독교를 비롯한 인류 종교문화의 한 근간을 이루고 있는 통념이기도 합니다. 이는 인간의 육체를 근본적으로 죄악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육체적 고통을 통해 정신을 정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영혼 정화를 위한 고행’이라는 수행 전통은 서양 중세 기독교 수도원에서도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광신적 속죄’ 행위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영혼과 육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아래, 육신을 죄악시 하거나 하열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여전합니다. 이는 여러 정신 병리학적 문제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행의 무익함에 대한 부처님의 통찰은 당시 인도 종교문화의 문제를 넘어 인류문명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고행의 무익함에 대한 부처님의 통찰이 지니는 또 다른 의의는 ‘행복’에 대한 당시 수행자들의 통념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오랜 고행의 과정에서 견지하고 있었던 믿음, ‘행복은 반드시 피해야 하고 해탈에 이르기 위해선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통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집니다. ‘나는 왜 행복을 두려워하는가!’ 

그러면서 출가 전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감각적 욕망을 떨쳐 버리고 불선한 상태를 떨쳐버린 뒤, 사물에 대한 고찰이 지속되면서 떨쳐버림에서 오는 즐거움(喜)과 행복이 있는 초선의 몰입을 얻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이…‘최상의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적합한 길일지도 모른다.”

고행을 버린 부처님은 이제 더 이상 해탈을 위한 의도적인 고(苦)를 추구하지 않고, 선한 상태의 행복감(樂)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고·락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 불선(不善)한 마음의 상태가 줄어들고 해탈에 유익한(善) 상태가 증가하느냐’의 여부를 정확히 자각해야 함을 통찰했습니다.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 체득된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성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괴로움은 피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행복의 증진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행은 그 반대입니다. 고통을 자발적으로 수용할 뿐 아니라 괴로움을 추구함으로써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고·락의 중도는 행복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바꿔 놓았습니다. 고는 좋고 락은 나쁘다는 ‘고행주의’도 옳은 길이 아니며, 고를 회피하고 락을 추구하는 ‘행복’에 관한 일반적 태도도 잘못됐음을 통찰했습니다. 

고행이 깨달음으로 이끄는 길이 아니듯이, 행복 그 자체가 깨달음을 장애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행복인가’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행복인가’ ‘선한 마음의 상태인가’의 여부입니다. 

욕망·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행복은 선한 것이고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번뇌를 증장시키는, 감각적 만족을 통한 행복이 아니라 번뇌의 감소를 가져오는 내적, 정신적 만족을 통한 행복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내적 만족감 또한 감각적 만족과 마찬가지로 ‘조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넘어서야 할 과정이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가 해탈을 방해하거나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고락중도(苦樂中道)란 고·락에 대한 오랜 통념을 거부하고, 선·불선의 함수관계로 고·락의 의미를 새롭게 정초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한 행위는 행복을 증진하고 불선한 행위는 고통으로 나아간다’는 통찰이 바로 고락중도의 핵심입니다.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행복과 고통에 대한 ‘느낌’ 즉 행복감 혹은 괴로움 그 자체가 선이거나 불선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해탈로 나아가는데 유익한가’의 여부를 자각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결국 수행이란 감각적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행복감을 버리고,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행복감을 계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이해하듯 고락중도는 향락적 삶과 고행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해탈에 이른다는 고행주의를 버리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론 욕망의 충족이 곧 행복의 증진이라는 일반적 통념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락중도는 욕(慾)과 욕(欲)을 구별하는 유가적 의미의 절제하는 욕망과 구별되며, 적절함을 뜻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도 구별됩니다. 

고락중도의 실천적 의미는 ‘적절한 욕망’을 긍정하는 일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강조한 ‘소욕지족’의 금욕적 삶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74호 / 2021년 2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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