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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깨달음의 문명사적 의미  ①

통찰의 깨달음으로 사제주의 깬 인류사적 사건

부처님 깨달음은 치열한 사유와 이성적 검증이 토대가 된 통찰
신과 사제 중심이었던 전통 질서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 강조
좋은 과보는 선한 의도에서…수행으로 관점 바꾼 혁명적 가르침

부처님의 깨달음은 한 개인의 특수한 종교 체험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재현 가능한 체험이었다. 동시에 치열한 사유와 이성적 검증이 토대가 된 통찰이었다. ‘경전에 들고 가르침을 논하는 스님들’. 1~3세기. 파키스탄 스와트박물관 소장. 
부처님의 깨달음은 한 개인의 특수한 종교 체험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재현 가능한 체험이었다. 동시에 치열한 사유와 이성적 검증이 토대가 된 통찰이었다. ‘경전에 들고 가르침을 논하는 스님들’. 1~3세기. 파키스탄 스와트박물관 소장. 

부처님께서 태어나서 활동하던 기원전 5~6세기 인도사회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우선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농업에 철기가 사용됨으로써 자급자족을 넘어 잉여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갠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상당한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었고 전통적으로 유목민이었던 바이샤들이 점차로 농민 그리고 상인계층으로 자리를 잡게 되던 시기였습니다. 이와 함께 종교·문화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자유사상가라 불리는 사문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이들은 수백 년을 넘어 이어오던 베다의 종교적 권위를 부정하고 바라문교의 제도와 종교적 특권을 거부하고 고행과 명상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습니다. 싯다르타도 한 때 이들과 함께 하였지만 그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님을 깨닫고 자신의 길 ‘중도’를 통해 깨달음을 이루어 ‘깨어난 자(buddha, 覺者)가 되었습니다. 경전에서는 여러 신화적 요소를 통해 부처님의 깨달음이 우주적 사건이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탄생이 그랬듯이 세계 주요 종교들은 자신들의 교주의 등장을 우주적 사건이었음을 여러 방식을 통해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우주적 사건은 해당 종교전통 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등장은 그 성격이 다릅니다. 잠에서 깨어난 자에게 전후의 세상이 다르듯이 무지와 미몽에서 ‘깨어난 자’로부터 펼쳐지는 세상은 그 이전과 이후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저는 ‘깨어난 자’, 부처님의 등장을 문명사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부처님의 깨달음은 오늘날 종교학에서 말하는 ‘신비체험’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종교학에서 신비체험이란 한 개인의 특수한 종교체험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을 ‘특수한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말을 빌자면 “재현될 수 없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아빌라의 테레사라고 하는 스페인의 성녀(聖女) 테레사(1515~1582) 그리고 철학자이자 종교연구가인 엠마누엘 스베덴보리(1688~1772)가 말하는 종교적 체험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이들의 체험과 구별됩니다. 우선 부처님의 깨달음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 ‘신비체험’이 아니라 치열한 사유와 이성적 검증을 거친, 통찰에 의한 깨달음입니다. 이 통찰을 불교전통에서는 ‘깨달음의 지혜’ 즉 보리(bodhi)라고 합니다. 삼법인, 연기법 등 불교의 기본 교리는 이성적 사유를 거친 깨달음의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성적 사유를 넘어서 있다고는 할 수 있으나 이성적 사유를 결(缺)하거나 이성적 사유에 반(反)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재현 가능한 체험’입니다. 부처님은 ‘말씀’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했고, 그들 또한 동일하게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한 수행자 개인의 특수한 종교체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나누는 인류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먼저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문주의(humanism)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인본주의라 일컫기도 하는 인문주의란 사유체계의 근원으로서 인간존재를 중시하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중요하는 정신입니다. 당시 바라문교가 제공하던 신(神)중심의 세계관과 바라문계급의 사제(司祭) 중심의 사회적 질서를 벗어나는 대 전환을 이루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탄생게 사구(四句)중 첫 두 구절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나 사제가 아니”라는 의미와 함께 신과 종교의 굴레를 벗어던진 자유로운 인간의 탄생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전법선언은 좀 더 직접적으로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법선언의 서두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의 굴레,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하늘의 굴레,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깨어난 자’는 해탈한 자요 무지와 미망의 굴레에서 벗어 난 자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굴레’란 생사유전의 원동력인 욕망의 굴레이며 ‘하늘의 굴레’란 다름 아닌 바라문교가 제공하던 신 중심의 세계관, 사제중심의 사회적 질서, 전통이란 이름의 굴레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깨어난 자’는 욕망의 굴레 그리고 전통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진 자유로운 자입니다. ‘자유’(自由)란 ‘스스로 말미암는 존재’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 우리의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것은 저 하늘의 신이거나 혹은 그 신에게 공물(供物)을 바치는 사제(司祭)의 제사행위가 아니라 각자의 ‘도덕적 행위’임을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하셨습니다. 본래 인도의 종교문화에서 ‘행위’ 즉 카르마(karma, 業)란 바라문의 제사행위를 의미했습니다. 제사행위에 따른 과보가 곧 내 삶에 주어진 ‘몫’이었습니다. 몫의 크기를 결정하는 자는 신이었고 그 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제식에 바쳐진 공물과 바라문의 제식행위였습니다. 여기에 개인의 윤리나 도덕이 개입될 여지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미래의 과보를 낳는 것은 ‘제사’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닦는’ 행위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행위는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언어적 행위가 아니라 바로 마음의 행위였습니다. 마음의 행위란 곧 ‘의도’를 뜻합니다. 모든 신체적, 언어적 행위의 근저에 ‘의도’가 있다는 점을 간파하신 겁니다. 선한 의도는 좋은 과보를 가져오고 악한 의도는 나쁜 과보를 가져온다는 것은 지금은 마치 상식처럼 회자되고 있지만 (물론 정말 그렇게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다음 연재에서는 “윤회와 해탈을 마음의 동학(動學)으로 전환하다”라는 주제로 부처님의 깨달음이 가지는 문명사적 의미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76호 / 2021년 3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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