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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苦)의 소멸과 십이연기 ②

감수작용 통제 없이 열반에 이르는 과정은 없다

밧지국 우데나 왕이 핀돌라 존자에게 욕망 통제하는 방법 묻자
불교 부정관과 계로 욕망의 허망함과 무상한 집착 실체 안내
가장 쉽고 효과적 해결책은 의식이전 단계서 감수 통제하는 것

부처님을 포함한 어떤 깨달은 자라도 쾌·불쾌 등 모든 감각을 있는 그대로 감수한다. 하지만 그들은 쾌에 대해 좋은 마음을 내지 않고 불쾌한 감각에 싫은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림은 뉴욕 루빈 미술관이 소장한 ‘석가모니불(Shakyamuni Buddha)’. 70.5×46.7cm, 18세기, 티베트. 
부처님을 포함한 어떤 깨달은 자라도 쾌·불쾌 등 모든 감각을 있는 그대로 감수한다. 하지만 그들은 쾌에 대해 좋은 마음을 내지 않고 불쾌한 감각에 싫은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림은 뉴욕 루빈 미술관이 소장한 ‘석가모니불(Shakyamuni Buddha)’. 70.5×46.7cm, 18세기, 티베트. 

불교의 최고선인 열반에 이르는 과정에서 ‘감수작용’[受]에 대한 통제는 필수적입니다. 이 ‘통제’란 궁극적으로, 고·락·불고불락 모든 감수작용을 버리는데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경전에서는 “눈 등의 감각기관과 더불어 촉으로 일어나는 쾌·불쾌 혹은 중성적 감각 모두를 버려야 한다”고 하며 그런 감각들을 버리고 포기하는 한 방법은 명상을 통해 지각의 과정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受)의 본질에 대해 수행하는 한 명상법이 ‘대념처경’에 잘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호흡에 전심으로 집중할 수 있고 그런 수행을 통달한다면, 그는 쾌감을 느낄 때에 ‘이것은 무상(無常)한 것이구나’라고 알고 ‘나는 집착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즐기지 않는다’고 깨닫는다”고 합니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부처님을 포함한 어떤 깨달은 자라도 쾌, 불쾌 등의 모든 감각을 있는 그대로 감수(感受)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쾌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불쾌한 감각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뿐입니다. 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수행자는 마음을 기쁘게 하는 대상을 볼 때 그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거기에 흔들리지 않으며…욕망을 품지 않는다. 그의 몸은 확고부동하며 태연하며, 그의 마음은 단단하고 요지부동이며, 마음을 잘 안정시켜 자유롭다. 혐오감을 일으키는 대상을 볼 때도 그는 거기에 충격을 받지 않으며, 마음은 그것 때문에 동요되지 않으며 억압받지 않으며 화내지 않는다[S V 74]”입니다.

요컨대 (쾌·불쾌 등의)감각적 경험은 누구에게나 일어나지만, 그것에 대한 집착은 통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착의 통제는 의식의 단계보다 의식 이전의 단계에서 더 쉽고 효과적으로 차단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편 이미 루네 요한슨(Rune E.A. Johansson)도 지적한 바와 같이, 수(受)에 관한 파알리 경전의 언급을 살펴보면 쾌·불쾌 등은 (흔히 감각에 관한 일반적 이론에서 주장하듯이)지각 대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아니라, 대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언급들이 흔히 발견됩니다. 이를테면 “눈으로 인식되는 대상들이 있다. 바람직한 대상들, 쾌감을 주는 대상들, 기쁨과 애착을 담은 대상들, 열망으로 충만한 대상들, 육욕을 자극하는 대상들이 있다.” [Johanson 101; S IV 158] 

요컨대 대상들이 관찰자의 마음에 어떤 쾌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가 쾌락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또 “쾌락을 주는 시각적 대상과 시각의 의식이 함께 만날 때, 그 쾌락의 촉에 인연하여 쾌락의 수/느낌이 있다.” [Johanson 101; S IV 114]  

이때 쾌락은 관찰자의 주관적 느낌이라기보다 대상 자체의 성질입니다. 이러한 언급을 수(受)에 대한 초기 불교의 일반적 입장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성급하다고 생각되지만 경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는 쾌락이 대상 자체의 성질이라는 입장에 (초기)불교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밧지국의 우데나 왕이 핀돌라 존자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질문을 합니다.

“존자는 아직 젊은데 어떻게 이성에 대한 욕망을 다스려 들짐승 같은 마음을 순일하게 유지 합니까?” 

이에 대해 핀돌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합니다.

“늙은 여인을 보면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중년의 여인을 보면 누이나 동생으로 생각하고, 어린 처녀를 보거든 딸이라고 생각하면 들짐승 같은 마음을 다스려 순일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우데나 왕은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그래도 이성을 보면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 탐욕이 불붙을 수 있는데, 더 좋은 방법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핀돌라는 육체란 결국 똥·오줌·가래·고름 등과 같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가죽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부정관(不淨觀, 육체는 더러운 것으로 무상한 것이라고 명상하는 것)으로 그러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우데나 왕은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이성을 보면 깨끗하다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더 좋은 방법이 없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핀돌라는 붓다의 또다른 가르침을 인용합니다. 

“모든 감각 기관의 문을 굳게 지키고 그 마음을 잘 붙잡아 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눈이 어떤 대상을 보았다면 거기에 집착하지마라. 대상에 집착하면 탐욕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눈의 지각 대상인 색과 모양, 귀의 소리, 코의 향기, 혀의 맛, 몸의 촉감, 생각의 분별 등을 잘 단속해야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 날 수 있다” [雜阿含, 43권 no. 1165에서 축약번역]

이 에피소드는 (초기)불교의 수행 단계를 구체적 실례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의 단계, 즉 이성을 보면 누이나 어머니로 생각하라는 것은 계 등을 지키는 도덕 수행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두 번째는 욕망의 허망함과 그 대상의 무상함을 명상적 훈련을 통해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수행은 일시적인 해결책은 될 수 있겠지만 그 어느 것도 궁극적 해결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궁극적 해결은 “감각기관의 문을 단속”하는 것입니다. 감각 기관의 문(dvāra)이란 다름 아닌 쾌, 불쾌 등의 감각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감각 경험은 불교적으로 볼 때 전의식(前意識, sub-consciousness)적인 것으로 전문적인 명상 훈련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각 기관의 문을 단속한다는 것은 곧 불교에서의 성자(聖者)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91호 / 2021년 6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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