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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깨달음의 문명사적 의미 ②

윤회·해탈을 ‘마음의 동학(動學)’으로 전환한 일대 사건

윤회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법칙 아니라 행위의 문제
수행 과정 알려주며 깨달음 얻도록 도와준 부처님은 ‘교사’
비밀스런 가르침·범어 활용 거부…“중요한 건 권위 아닌 소통”

인도 산치 불교기념물군(Buddhist Monuments at Sanchi). 산치대탑으로 불린다.  198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사진은 남문 토라나에 새겨진 법륜.
인도 산치 불교기념물군(Buddhist Monuments at Sanchi). 산치대탑으로 불린다.  198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사진은 남문 토라나에 새겨진 법륜.

지난 연재에서 부처님의 출현은 신(神)중심적 세계로부터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강조하는 인문적 세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종교행위의 중심이 ‘제사’로부터 ‘수행’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바라문교를 공고히 뒷받침하고 있던 사제주의를 폐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제주의란 신과 인간을 매개하고 신을 대리한다는 사제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 바라문은 혈통에 의한 세습적 사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높은 영적·정신적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로 ‘바라문’이란 용어를 사용하셨지만 그것은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에 따른 것임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비롯하여 출가자 누구에게도 사제와 같은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제도화하지 않았습니다. 상호 공경할 것을 강조하셨고 누구나 동등하게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는 수행자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 등장한 대승의 보살사상은 ‘모두가 수행자’라고 하는 평등과 상호공경의 정신을 출·재가 모두에게로 확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그 길을 향한 우리 모두는 수행자일 뿐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도덕적 주체로서 개인의 강조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강조하시는 행위의 도덕적 준거는 인종·성별·계층 등을 초월한 보편윤리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후일 힌두교 성전 ‘바가바드기타’에서 강조하고 있는 계급적 책무 ‘sva-dharma’와는 다른 세계관이자 윤리관입니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최고 신(神) 크리슈나는 사촌들과의 전투(戰鬪)를 앞에 두고 고뇌하는 아르쥬나(Arjuna)에게 친족 간의 살육을 ‘허용’하는 것을 넘어 크샤트리야의 계급적 ‘책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카스트 제도를 신적 질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바라문교 세계관에서나 이해될 수 있을 뿐 인류문명의 보편적 관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 출현의 두 번째 문명사적 의미는 윤회와 해탈의 문제를 마음의 동학(動學, dynamics)으로 전환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입니다. 

베다 전통이래 바라문교에서 윤회란 자연의 순환과 같은 일종의 ‘자연법칙’으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우파니샤드에서 윤회를 설명하는 ‘오화이도’(五火二道)설이 바로 그런 이해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윤회와 해탈의 문제를 마음(욕망)의 문제로 전환하셨으며, 이제 비로소 윤회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자연 법칙’이 아니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행위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부처님께서는 행위(업)와 그 결과(업보)간에 도덕적 인과관계가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윤회는 그 도덕적 인과관계가 펼쳐지는 장(場)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윤회와 해탈은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행위와 욕망의 문제로 그 차원을 달리하게 됩니다. 십이연기가 보여주는 욕망의 발생과 소멸의 과정은 불교가 바라보는 마음의 동학(動學)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심리학’이란 말 대신에 ‘마음의 동학’이란 말을 쓰기를 좋아 합니다. 불교가 바라보는 ‘마음’이란 어떤 정태적 상태가 아니라 동적(動的)과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출현의 또 다른 문명사적 의미는 ‘교사’로서의 역할입니다. 부처님 이전 우파니샤드의 철인(哲人)들은 그들의 지식을 비밀한 것으로 여겼으며, ‘우파니샤드’가 ‘가까이 앉음’을 의미하듯 그들이 성취한 지식은 스승과 제자 간에서만 비전(秘傳)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수행 경험을 공유하셨고 당신이 성취했던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주셨던 ‘교사’였습니다. 교사란 모범을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교시’가 아니라 가르침을 주는 역할입니다. 부처님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도인(道人), 반쯤 눈을 감고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알 듯 모를 듯 어려운 말로써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은 평생 제자들과 일상을 함께 하였고 일상의 언어로 가르침을 주셨던 ‘친절한’ 교사였습니다.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설법하셨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을 꿰뚫어 보는 부처님의 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친절’에 바탕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자면 친절이란 “도움 받는 사람의 유익함을 위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법력(法力)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설법하셨습니다. 이는 “나는 길이요 진리이니 나를 따르라”고 하는 말과도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물론 기독교 성경의 이 말은 다른 맥락적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비교를 할 수는 없습니다.)

교사로서 부처님의 친절함은 당신의 ‘언어관’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몇몇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산스크리트어로 편찬하자고 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대중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 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당시 산스크리트어는 종교적 표준어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있던 언어였습니다. 당시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는 바라문과 크샤트리야 계급만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바라문들이 암송하는 베다의 한 구절을 듣고 외웠던 하층계급 아이의 혀를 잘랐다는 얘기가 전해올 만큼 산스크리트의 종교적 권위는 당시 인도에서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진리는 오직 산스크리트어만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이 당시 엘리트들의 일반적 통념이기도 하였습니다.

동서고금 모든 문화에서 언어는 사회적·문화적 권위의 한 표상입니다. 서양 중세의 라틴어가 그랬고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한문이 그러했습니다. 일반 백성과의 소통이 필요했던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지만 조선에서 한글이 공식 언어로 사용되는 데에는 5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한글로는 문화적 권위를 담을 수 없다는 조선 엘리트들의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2600여년 전 부처님께서는 언어의 기능은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아시고 실천하셨던 분입니다.

니체는 “친절과 사랑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치료적인 약초와 물질”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부처님을 가리켜 세상의 의왕(醫王)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부처님이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던 친절함과 사랑(자비심)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78호 / 2021년 3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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