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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苦)의 소멸과 십이연기 ①

욕망으로부터 해탈하려면 선정으로 알아차려야

눈 앞의 물질 감지했을 때 의지와 상관 없이 ‘좋다’ ‘싫다’ 올라와
감수작용 따라 인식 범주 들어가 경험에 따른 심리 반응 일으켜
‘의식되기 전’ 감수작용 알아차리려면 지계와 선정 수행은 필수

의식된 감각 경험을 제어하기 위해선 상당한 의지력과 강제력이 필요하지만 의식되기 이전 단계에서는 비교적 쉽게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 소장
의식된 감각 경험을 제어하기 위해선 상당한 의지력과 강제력이 필요하지만 의식되기 이전 단계에서는 비교적 쉽게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 소장

오온설은 경험(혹은 존재)을 해체·분석한 것으로 ‘경험’의 구성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지 지각(知覺)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계기적 순서에 따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간적·계기적 순서에 따른 지각의 과정에 대한 불교적 이해는 십이연기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경험을 예로 이 오온설에 따른 지각의 과정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나무를 보고 있는’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1) 눈이 앞의 어떤 물질[색]을 감지한다: 색온
2) 지각된 ‘색/물질’의 ‘형태’와 ‘색깔’ 등은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어떠한 감수 작용(고, 락, 혹은 불고불락)을 일으킨다: 수온
3) 그리고 지각된 ‘색/물질’은 인식될 수 있는 범주로 개념화 된다: 상온
* 2)와 3)의 과정은 너무나 미세하여 구분되어 감지되기 어렵다.
4) 지각된 ‘나무’는 일정한 심리적 반응을 일으킨다. 이 반응의 과정과 반응의 방식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과거의 경험’ 즉 업(業)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반응은 또 다른 업을 행온에 축적하게 된다: 행온
5) ‘나무’로 개념화된 지각 대상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식온

불교에서 ‘나무를 보는’ 하나의 경험을 해체하여 다섯 요소로 나누는 것은 다섯 요소 중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일련의 연기적 관계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연기적 관계란 A의 존재를 조건으로 해서 B가 있고, 만약 A가 없다면 B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1)에서 5)까지의 다섯 요소는 어느 하나도 독립된 실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자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나무를 보는’ 경험만 있을 뿐 ‘경험자’는 없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무아설을 일련의 경험으로 확장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는 나무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나무를 한 그루 사서, 나무를 심었다”라는 일련의 행위 가운데 ‘보고’ ‘생각하고’ ‘사고’ ‘심는’ 일련의 행위에 동일한 ‘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교 전통에 따르면 일련의 행위의 근저에 동일한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 혹은 무명(無明)의 소산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고(苦)의 근본 원인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내가 ‘보고’ ‘생각하고’ ‘사고’ ‘심는’ 것이 아니라, 볼 때는 보는 것이 ‘나’이고, 생각할 때에는 생각하는 것이 ‘나’입니다. 그리고 ‘나’는 항구 불변의 ‘나’가 아니라 경험으로 구성되는 현상적인 ‘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십이연기설은 불교적 관점의 세계의 기원과 소멸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기원’이란 고(苦)의 기원이며 그 소멸이란 곧 고의 소멸을 뜻합니다. 또한 십이연기설은 ‘지각과 인식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십이연기설에 대한 초기불교 경전의 한 대표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눈과 (그 대상인)색(色)이 있음으로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눈과 색이 만나는 것을 촉(觸)이라고 한다. 촉으로 인해(혹은 촉을 緣으로 하여) 수(受)가 있다. 수(受)가 있으므로 애(愛)가 있다. 애가 있으므로 취(取)가 있다. 취가 있으므로 유(有)가 있다. 유가 있으므로 생(生)이 있다. 생이 있으므로 노·병·사(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있다. 이것이 세계의 기원이다.”[S II 73 중에서]

이러한 지각 과정은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그리고 내적 감각/관념과 마음 등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감관+감관 대상 → 안·이·비·설·신·의식 → 촉-수-애-취-유-생-노사

이 과정은 지각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고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닫지 못한 일반인에게 있어 이 과정은 필연적인 것으로 우리가 지각(知覺)이라고 하는 생명 활동을 하는 한 고는 불가피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의 과정을 소멸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불교 전통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수행을 통해 고(苦)가 발생하는 과정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계를 지키는 것, 선정에 드는 것, 그리고 해탈의 지혜를 얻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선 계를 통해 애(愛)를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경전에서는 “애(愛)가 완전히 사라지고 멈춤으로써 취/집착이 멈춘다. 취가 멈춤으로써 유가 멈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세계의 소멸[유의 멈춤]은 곧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본 것입니다. 

불교에서 계(戒)란 금계(禁戒)의 의미로서 주로 욕망에 기초한 우리의 행위를 의지력으로써 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지각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감각 혹은 느낌들에 대한 우리의 일차적 반응을 통제함으로써 고통의 발생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의지력에 의한 통제는 일시적일 수는 있으나 근원적인 해결이 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계를 통한 욕망의 통제보다 좀 더 근원적인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은 욕망의 원인이 되는 느낌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보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여기서 ‘느낌’이란 전의식(前意識, sub-consciousness)에서의 감수작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기 이전의 ‘느낌’이기 때문에 일상적 경험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선정수행은 전의식(前意識)에서의 감각 경험을 ‘의식되기’ 전에 미리 ‘알아차려’ 욕망을 쉽게 제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일단 ‘의식된’ 감각 경험은 이를 제어하기 위해 상당한 정도의 의지력 혹은 강제력이 필요하지만, 의식되기 전의 단계에서는 비교적 쉽게 제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정수행은 욕망으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을 위한 단계이자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89호 / 2021년 6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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