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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의 지중한 인연들 모였기에 ‘불교중흥’ 염원 반드시 실현될 것

  • 교계
  • 입력 2021.10.22 22:26
  • 수정 2021.10.24 16:17
  • 호수 1606
  • 댓글 1

삼보사찰 천리순례 마친 김형규 법보신문 대표

지난해 자비순례 이어 올해도 순례대중으로 참여해 전 구간 완주
천리순례는 발의·준비·참가·맞이·뒷바라지한 모든 이들이 주인공
​​​​​​​법보신문은 포교·호법의 역할로 불교중흥 여정 끝까지 함께 할 것

김형규 대표는 이번 천리순례가 100년에 한번 물 위에 떠오르는 바닷속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널빤지를 만나듯 희유하고 감사한 인연이라고 말한다. 밀양 사자평=김현태 기자
김형규 대표는 이번 천리순례가 100년에 한번 물 위에 떠오르는 바닷속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널빤지를 만나듯 희유하고 감사한 인연이라고 말한다. 밀양 사자평=김현태 기자

아득하고 먼 길이었다. 송광사에서 지리산을 넘어 해인사를 거쳐 통도사에 이르는 천릿길. 전남과 전북, 경북과 경남의 4개 지역을 가로지르고 가파른 고개들이 불쑥불쑥 가로 막아서던 423km의 험난한 여정. 때론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늦더위에 여기저기 땀띠가 돋고, 갑작스런 시월한파에 오돌오돌 떨기도 했다. 며칠간 쏟아 붓는 폭우 속을 걷는가 하면 칠흑 같은 어둠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서로 의지해 나아가야 했다.

10월1일부터 10월18일까지 진행된 상월선원 만행결사 삼보사찰 천리수행. 김형규(진여·53) 법보신문사 대표는 100여명의 순례대중들과 그 길에 올랐다. 다부진 체격이 아닌데다가 소화기능이 약해 자칫 화장실 문제로 난감해질 수 있음을 잘 알았다. 그렇더라도 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하고 더 조심하면 될 일이었다. 순례를 앞두고 틈틈이 걷기운동으로 몸이 익숙하도록 했고, 순례가 시작된 후에는 더 적게 먹고 몸을 세심히 관찰하려 했다. 새벽이라기보다 한밤중에 가까운 오전 2~3시에 일어나 걷는 일이나, 비좁은 텐트에서 잠자리에 드는 것도 곧 익숙해졌다. 짓물렀던 발이 아물고 비명을 내지르던 온몸의 뼈마디와 근육들도 고단한 일과를 서서히 받아들였다. 비로소 가을 산천의 아름다움이 눈에 확연히 들어왔고 내면의 깊은 세계로도 침잠할 수 있었다.

김 대표는 지난해 10월7일부터 27일까지 21일간 대구 동화사에서 서울 봉은사까지 511km를 걷는 ‘불교중흥·국난극복 자비순례’에 동참했었다. 이번 송광사에서 통도사에 이르는 천리순례에도 가장 먼저 참여의사를 밝혔다. 불자와 출가자 감소로 불교가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상황에서 ‘불교중흥’이라는 구호가 절실하게 와 닿았고 어떻게든 힘을 보태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대표로서 매일 급박하게 돌아가는 신문사를 장시간 비운다는 게 여간 큰 부담이 아니었다. 다행이 임직원 모두 이를 공적으로 받아들였고, 편집국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천리순례를 두 달 간 기획보도하기로 결정했다. 또 임직원들은 천리순례 기간 내 반드시 동참해 함께 걷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이를 결속의 계기로 삼자는 의견들이 제시됐다. 기자와 직원들은 주말을 이용해 함께 걸었고, 법보신문 공익법인 일일시호일에서는 현장을 찾아 순례대중에게 점심공양을 올리기도 했다.

걷는 내내 김 대표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기도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이 지혜롭기를, 그래서 자신과 함께 하는 구성원들이 모두 향상된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랐다. 나아가 한국불교가 발전하고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불교가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발원했다. 삼보사찰 순례 과정에서 만난 많은 부처님께도 그렇게 지심으로 기도했다.

광주가 고향인 김 대표는 스스로 불연(佛緣)이 깊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유학자였던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는 독실한 불자였다. 평생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지극정성으로 염송했으며, 장흥 보림사 신도로 퇴락한 사찰 불사에 적극 참여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탁발하러 온 스님들에게 쌀을 공양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본격적인 불교와의 인연은 고교시절 비롯됐다. 그 무렵 갑자기 열이 나고 숨 쉬기 버거운 날들이 늘어갔다. 병원을 찾아 정밀검사를 받았지만 도무지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고통은 수시로 찾아왔고 그럴 때면 아픈 몸을 웅크리고 고통이 가시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영향이었을까. 문득 참선을 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불교대학에 진전회(眞傳會)라는 수행동아리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지냈고, 한겨울 소백산에 텐트를 짊어지고 들어가 생쌀을 먹으며 정진하기도 했다.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려 했던 그 같은 노력들은 불교에 대한 신심과 열정으로 이어졌다. 병은 불편하지만 평생의 도반으로 받아들여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김 대표는 한때 출가를 결심했었으나 부모님의 격렬한 반대로 뜻을 접어야 했다. 법보신문은 졸업 무렵 알았다. 진보적이고 색깔이 분명해보였다. 불교기자는 포교와 호법, 모두 가능한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판단돼 법보신문에 응시했고, 다행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는 불자로서 기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불교언론은 현대불교사를 기록하는 사관이며,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 바람직한 신행·수행문화를 견인하는 전법사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또한 불교계 안팎에서 벌어지는 비불교적 행위와 훼불에 적극 대응하는 호법신장이어야 했으며, 비판을 넘어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국불교의 최전선에 서는 일이었다. 그는 이를 천직이라 여기고 취재현장에 뛰어들었다. 불교에 대한 부당한 공격이나 편향된 행위를 바로 잡고, 불자답게 사는 이들을 찾아 지면에 소개하는 것은 언제나 뿌듯하고 보람됐다. 국방부가 기독교 교리를 일방적으로 담은 ‘선도책자’를 제작해 장병들에게 배포할 때 이를 집요하리만큼 파고들어 심층보도함으로써 국방부 장관의 사과를 받아내는가 하면, 도자기에 큰스님들의 글씨를 새겨 전국적으로 불법 유통하는 조직을 발견해 이를 시정케 한 일도 있었다. 그렇게 숨 가쁜 날들이 더디게 흘러갔고 그는 데스크를 거쳐 2015년 12월 법보신문 대표에 취임했다.

법보신문은 1988년 불국사 조실 월산 대종사의 원력에 의해 창간됐고, 2005년 특정 종단이나 사찰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독립언론으로 거듭났다. 법보신문은 이제 사활을 걸지 않으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구성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불교언론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논의하고 실천에 옮겼다. 매주 월요일 전 직원이 모여 법회를 연 뒤 한 주를 시작하고 매달 불서 읽기 모임을 진행했으며 새로운 직원은 불교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도록 했다. 산업현장에서 다친 외국인 노동자들의 치료비를 지원하고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을 돕기 위해 사단법인 일일시호일을 설립했으며, 좋은 불서를 만들어 보급할 수 있는 출판사인 모과나무도 만들었다. 그렇게 구성원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신심과 원력으로 일을 해나갔다.

이학종·남배현 대표 등 전임자들의 뒤를 이은 김 대표도 불교언론은 본령에 충실할 때 불교계의 신뢰를 얻고 불교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곧 법보신문이 슬로건으로 내건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정토세상 열어가는 법보신문’을 실현하는 길이라 믿었다.

김 대표는 송광사 새벽예불을 시작으로 무수한 걸음걸음을 옮겨 마주한 사성암,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 해인사, 홍제사, 표충사, 통도사에서의 감격과 환희로움을 결코 잊지 못힌다.
김 대표는 송광사 새벽예불을 시작으로 무수한 걸음걸음을 옮겨 마주한 사성암,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 해인사, 홍제사, 표충사, 통도사에서의 감격과 환희로움을 결코 잊지 못힌다.

어렵게 삼보사찰 천리순례에 나선 김 대표에게 18일간의 천리순례는 힘겨움 못지않게 숱한 감동과 불자로서의 자긍심을 선사했다. 순례대중이 향하는 곳마다 지역 불자들과 스님들이 현수막을 내걸고 길가에 나와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대선후보는 물론 지역 정치인들과 지방자치단체장들, 시골 이장까지 동참해 길을 걸었다. 정치인들의 방문을 불편해하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김 대표는 그리 여기지 않았다. 기러기들이 줄을 맞춰 유유히 하늘을 날듯 스님과 불자들이 하나가 되어 질서정연하게 순례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불교가 세상 속에서 펄펄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모습을 꼭 알았으면 했다. 순례 현장을 직접 찾은 그들이 어찌 불교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종교편향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천리순례는 신심과 결속의 길이었고, 동시에 포교와 호법의 길이기도 했다.

김 대표는 송광사 새벽예불을 시작으로 무수한 걸음걸음을 옮겨 마주한 사성암,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 해인사, 홍제사, 표충사, 통도사에서의 감격과 환희로움을 결코 잊지 못한다.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친견하고 통도사 금강계단을 맨발로 참배했던 경험도 천리순례가 가져다 준 일생일대의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김 대표는 순례기간 스님들이 보여준 여법함을 기억한다. 회주 자승 스님에 대한 존경심도 더욱 깊어졌다. 스님은 원래 관절이 좋지 못한데다가 올해는 순례 직전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스님은 달랐다. 젊고 성한 몸으로도 버거운 머나먼 천릿길을 끝까지 앞장서 인솔했다. 대중들과 똑같이 텐트에서 자고 일어났으며 길에서 함께 공양했다. 걷는 도중 엄지발톱 두 개가 모두 새까맣게 죽어 붕대로 싸매고 걸어야 했지만 힘든 내색 한번 없이 대중들에겐 항상 미소로 대해 모두를 감동시켰다. 이전의 상월선원 천막결사와 자비순례에서도 그랬듯 스스로에 한없는 엄격함과 초인적인 절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대표는 불교중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모습에서 한국불교가 스님에게 굉장한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새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존경하는 스승일수록 멀리서 모시라는 옛말이 다 옳은 것은 아니었다.

천리순례를 마친 김 대표는 야위고 초췌했지만 눈빛은 더 맑고 깊어졌다. 그는 이번 순례가 100년에 한번 물 위에 떠오르는 바닷속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널빤지를 만나듯 참으로 희유한 인연이라 생각한다. 천리순례를 발의하고, 준비하고, 참가하고, 맞이하고, 뒷바라지하고, 취재보도하고, 격려해준 수많은 인연들이 얽힌 인드라망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억겁의 지중한 인연들이 모였기에 ‘불교중흥’이라는 절절한 염원이 현실에서 꽃을 피울 것이며, 그 장엄한 여정에 김 대표도 법보신문도 함께 할 것이라 거듭 다짐했다.

이재형 편집국장 mitra@beopbo.com

[1606호 / 2021년 10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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