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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처럼 내리꽂히며 시의 세계로 이끈 언어의 묘리

  • 불서
  • 입력 2021.10.29 20:39
  • 수정 2021.10.29 20:57
  • 호수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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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라구
윤재웅 지음 / 도서출판 동악 / 133쪽 / 1만6000원

저명한 시 연구자·문학평론가…‘상월선원’ 책 계기로 시에 매진
짙은 불교색·독특한 양식 특징…애절함 넘어 위로와 성찰 선사

지난해 상월선원 자비순례에 이어 올해 삼보사찰 천리순례에도 동참한 윤재웅 동국대 교수는 “‘어쩌라구’라는 말은 운명에 맞서는 씩씩한 돌주먹”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상월선원 자비순례에 이어 올해 삼보사찰 천리순례에도 동참한 윤재웅 동국대 교수는 “‘어쩌라구’라는 말은 운명에 맞서는 씩씩한 돌주먹”이라고 말한다.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인 저자는 시 연구자이며 평론가다. 김소월과 서정주의 시를 연구해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한 후 당대 최고 시인들의 시세계를 면밀히 분석하며 그 안에 담긴 심오한 뜻을 펼쳐보였다. 저자는 논문과 평론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제주도 도깨비도로를 소재로 흥미진진한 모험소설을 쓰는가 하면 여섯 권의 동화책을 집필했다. 근래에는 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을 걸으며 인간의 숭고함을 성찰한 여행에세이를 펴내기도 했다.

글쓰기의 팔방미인인 저자가 단연 사랑한 건 시였다. 강단에서 시도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은 오랜동안 시 쓰기에 거리를 두었다. 주변에선 의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때 만해백일장에서 시를 써 대상을 받았고, 그 인연으로 국문학을 전공했기에 더 그랬다. 남들에게 굳이 털어놓진 않았지만 저자를 절망시킨 건 대학에서 만난 은사 서정주 시인이었다. 스승의 시를 읽으면 존경과 감탄이 절로 났다. 동시에 아무리 잘 쓰더라도 그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절망감도 깊어졌다. 그렇게 시 쓰기는 조금씩 멀어졌다.

시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뒤바꾸는 변곡점은 기연처럼 다가왔다. 2019년 11월부터 3개월간 아홉 명 스님이 한겨울 야외천막에서 생사를 건 정진을 다룬 ‘상월선원’을 읽으면서다. 상월결사를 처음 제안한 자승 스님이 화이트보드에 쓴 ‘어쩌라구’라는 부분에 이르러서였다.

이 단어는 저자의 마음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어둠이 걷히고 꽉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열렸다. ‘어쩌라구’는 아주 묘한 매력이 있었다. 원망과 한탄, 체념과 하소연으로 읽히는가 하면 반발과 저항, 강한 자존감과 자립심도 내포하고 있었다. 일정한 틀에 스스로를 가둔 채 스스로를 한계 지으며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어쩌라구’는 실천성이 담긴 혁명적인 언어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시도 쓰고 싶으면 그냥 쓰면 될 일이었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도대체 어쩌라고…. 굳이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애초 시의 정신에도 어긋났다. 오랜 세월 쌓아올렸던 공고한 벽이 무너지자 시심은 샘물처럼 솟아 자신을 물들이고 언어로 형상화됐다. 시를 향한 젊은 날의 짙은 감수성은 사그라든 게 아니라 오히려 내면 깊은 곳에서 절절해지고 더 웅숭깊어져 있었다.

환갑을 맞아 펴낸 저자의 첫 시집 ‘어쩌라구’는 주머니 속 송곳처럼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느지막이 불교에 심취해 초기불교 경전인 ‘니까야’를 독송하고, 동국역경원 ‘불교성전’을 50년 만에 재출간하는 과정에서 전체 윤문을 맡는 등 불교공부가 깊어지니 사고도 언행도 어느새 말뚝신심의 불자가 됐다. 시집에도 불교 색채가 가득하다. 생로병사의 고통, 윤회의 아픔, 깨닫고도 지상에 남아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의 발원 등이 다양한 모습으로 언어화됐다. 경상도·전라도 사투리의 능숙한 구사로 정겨움을 더하고, 세월호 사건을 불교적으로 해석한 연작시도 비통과 애절을 넘어 위로와 성찰을 던져준다. 이야기체, 전통 서정시, 한 줄 시 등 독특한 양식도 돋보인다.

도전이 없는 인생은 더 이상 가슴 뛸 일이 없다. 새롭게 도전하고 경계를 뛰어넘을 때 혜안과 생의 싱그러움도 되살아난다. 시집 ‘어쩌라구’는 지금 내가 당연시 여기는 생각들과 일상의 틀이 정답이 아닐 수 있으며, 지금 여기서 새롭게 딛고 일어서야함을 일깨워준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607호 / 2021년 11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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