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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항일운동사 재정립, 한국불교 정체성 되찾는 초석입니다”

  • 무진등
  • 입력 2021.11.05 21:31
  • 수정 2021.11.09 17:40
  • 호수 1608
  • 댓글 1

윤봉택(상민) 서귀포불교문화원장

용탑선원 고암 스님 “여 있거라” 한 마디에 14세 때부터 10년간 해인사서 출가자 생활
1991년 제주 서귀포시청과 인연돼 23년간 제주불교문화재 지정과 성보 보존에 앞장
‘보천교 난’을 ‘무오법정사 항일항쟁’으로 바꾼 주역…“스님들 주도로 이뤄진 항일운동”

“여서도 학교 다닐 수 있다. 집에 가지말고 여 있거라.”

고암 스님의 한 마디에 ‘까까머리’ 열 네살 소년은 그저 “예, 스님”하고 대답했다. 23년간 제주 법정사항일운동 고증에 앞장서온 윤봉택(66) 서귀포불교문화원장의 불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1970년 여름방학 우연히 머물게 된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그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정하자, 고암 스님은 며칠 뒤 그의 머리를 깎고 ‘정효’라 불렀다. 

“부처님 가르침 멀리 있지 않다. 계율 잘 지키고 법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라. 옳지 않거든, 다시 옳게 하거라.”

고암 스님(1899~1988)은 그에게 한없이 큰 존재였다. 온화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스님의 눈빛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곤 했다. 양주 윤(尹)씨였던 그는 고암 스님과 본관도 같았다. 세속 인연을 끊는 길에 들어섰지만, 어린 그에겐 노스님과의 소소한 공통점은 친근감을 갖게하는 일이었다. 때론 일찍 여읜 아버지 빈자리를 스님이 채워주는 것 같았다.

첫번째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윤봉택 서귀포불교문화원장. 1974년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에서.
첫번째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윤봉택 서귀포불교문화원장. 1974년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에서.

고암 스님은 그에게 ‘사미율의’를 가르쳤다. 그가 ‘사미율의’를 마치자 당시 해인사 주지였던 지관 스님(1932∼2012)에게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게 했다. 이어 스님은 “젊었을 때 견문도 넓히고 여러 도반도 사귀어야 공부하는데 좋을 것”이라며 1971년 그를 해인강원으로 보냈다.

열 네살에게 ‘까만건 글씨요 흰건 종이’였지만, 모든 시간이 마냥 좋았다. 새로웠고 신기했다. 하루는 법보전 입구 양 옆에 시원하게 갈라진 주련이 그의 마음에 생생히 와닿았다.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도량 어디인가, 지금 생사가 있는 바로 이 자리다.’ 

윤 원장은 두 문장에 흠뻑 취해 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환희심이 벅차올라, ‘나중에 도량을 세우게 된다면 꼭 원각사라고 지어야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어미 마지막 소원이다. 가문 이을 씨앗 하나만 심어 놓고 가라.”

윤 원장을 찾아온 어머니의 야윈 뺨에 눈물이 흘렀다. 장남으로서 죄책감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남편을 여의고 고달픈 생계를 이어온 어머니의 외로움은 늘 그의 가슴 한 켠엔 짙은 어둠처럼 깔려있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매몰차게 돌아섰지만 하루이틀 지날수록 희끗한 어머니 흰머리가 눈에 선했다.  

1980년 8월14일 산빛이 푸르고 매미가 매섭게 울어대던 어느날이었다. 끊어내지 못한 세연(世緣)이 거대한 파도처럼 윤 원장을 덮쳤다. 그는 다시 걸망을 멨다. 무거운 발걸음은 고향으로 향했다. 해인사에서 더이상 ‘정효’는 없었다. 

가야할 공부의 길은 여전히 멀기만 했다. 사회에 나가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세속 공부는 별 이익이 없겠다 싶었다.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보리수 학생회’를 만들었다. 어린이·청소년 포교에 주력하고 싶어 작은 공간을 마련했고, 학생들에게 ‘불교학개론’과 ‘금강경’을 가르쳤다.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 들었다.

농사는 적성에 제법 맞았다. 1985년 농민후계자로도 선정됐다. 덕분에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사찰 강원에서 쌓은 실력으로 중문농협 농사지도소에서 나온 대만 책을 한글로 번역하자 농민들에게 감사 인사도 받았다. 그 책은 제주도 농촌진흥원에서 ‘제주도 파인애플 교재’와 ‘제주도 바나나 교재’로 채택됐고, 그 이후 윤 원장이 한문에 밝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가야산 해인사에서의 추억이 아련하게 와닿을 땐 시를 써 마음을 달랬다. 우연히 쓰기한 시가 1991년 1월1일 ‘한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어느날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윤 원장에게 서귀포시청 문화공보실에서 연락이 왔다. 시정을 홍보할 직원이 필요한데 면접을 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긴 고민 끝에 1991년 7급 별정직 직원이 됐고, 행정 실력을 인정받아 1992년 10월 서귀포시청 향토사료 전임연구원이 됐다. 

제주향토사학자 김봉옥 선생을 만나게 된 건 시청에서 일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때 김 선생이 건넨 ‘정구용 재판 기록 판결문’은 그가 ‘법정사 항일운동’ 고증에 나선 출발점이 됐다. 당시 사건 관할은 시청 복지부였다. 하지만 그가 불교사에 대한 이해가 높고, 한학 실력이 뛰어나단 이유로 부서간 협약을 통해 사건을 담당하게 됐다. 김 선생은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에서 찾은 판결문과 명부를 주며, “이건 서귀포에서 일어난 불교계 항일운동이니 그대가 반드시 밝혀내달라”고 당부했다.

윤 원장은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고자 1993년부터 2014년까지 운동에 참여했던 관련자 신원을 모두 추적했다. 수형인 명부에 적힌 항일인사 66명의 후손들을 일일이 찾아 구술을 채록했다. 

후손들은 담백하게 이야기를 전했지만 그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한 손자는 “아버지와 묘소에 갔을 때 할아버지가 법정사에서 일본놈과 싸우다 잡혀가 고문을 당한 뒤 구루마(수레)에 실려왔다고 들었다”면서 “똥을 한 양동이 들고와 머리에 뒤집어 씌우는 등 몹쓸 짓을 했다”고 전했다. 

일본 경찰에게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고문을 받고 불구의 몸이 된 집도 다수였다. 기막힌 만행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하는 이들이 많았다. 자신의 할아버지·할머니는 전 재산 털어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그 대가는 가난이었다. 

“외손자 집을 어렵게 찾아갔어요. 근데 찾고보니 말도 못하게 허름하더라고요. 며칠을 씁쓸한 마음이 들었죠. 대한민국에 여전히 친일잔재가 청산되지 않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암울했다. 하지만 속상한 감정에 머무를 수만은 없었다. 그들의 공적을 찾고 국가보훈처로부터 유공 서훈과 정당한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윤 원장에겐 한 사람 한사람이 제 식구였다. 

연구가 지속되자 ‘보천교·태을교의 난’은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창규, 김연일, 방동화 스님 등 불교계 지도자들이 1918년 법정사에서 지역주민 400여명과 함께한 최초 항일운동이었다. 

23년간 서귀포시청에 근무하며 ‘법정사 항일항쟁’ 사료 발굴에 진력을 다한 윤봉택 서귀포불교문화원장은 “법정사 항일항쟁은 스님과 불자, 농민들이 이끈 불교계 최초의 항일운동”이라고 강조했다.  
23년간 서귀포시청에 근무하며 ‘법정사 항일항쟁’ 사료 발굴에 진력을 다한 윤봉택 서귀포불교문화원장은 “법정사 항일항쟁은 스님과 불자, 농민들이 이끈 불교계 최초의 항일운동”이라고 강조했다.  

윤 원장은 1996년부터 성역화 사업에 착수했다. 관계자들을 설득해 자연휴양림으로 묶여있던 법정사 지구 28만7375평을 해제시키고, 2003년 11월 ‘제주도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했다. 이외에도 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 정비, 기념탑 건립, 진입로 공사를 꾸준히 진행했다. 특히 기념탑 세 기둥 동판에는 목탁을 새겨넣어 불교계가 항일운동 주도했음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항일운동에 나섰어요. 백용성, 한용운, 백초월 스님만이 아니라 세월에 묻혀진 법명이 엄청 많습니다. ‘불교항일운동사’를 정립할 필요가 있어요. 이건 종단을 떠나 불교계가 힘을 모아야 해요. 이게 불교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성보들이 그의 손을 거쳐 문화재로 보호됐다. 국가지정문화재 37건, 등록문화재 14건, 도지정문화재 97건 등 148건의 보존 활용을 위한 정비 사업을 추진했고 관내 비지정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서귀포시향토문화유산보호조례를 제정했다. 또 법화사지, 존자암지 복원 발굴을 비롯해 약천사, 남국선원 등 전통사찰 지정과 선덕사, 봉림사 등 향토문화유산 지정에도 앞장섰다. 2012년에는 그간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을 수상했다. 

윤봉택 서귀포불교문화원장이 2015년부터 제주 쌍계암에 머물며 대중들에게 법정사 항일운동과 불교문화유산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윤봉택 서귀포불교문화원장이 2015년부터 제주 쌍계암에 머물며 대중들에게 법정사 항일운동과 불교문화유산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신행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2010년에는 서귀포시청에 공무원 불자모임 ‘반야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았다. 이후 ‘능엄경’ ‘원각경’ 강좌를 열어 함께 공부했다. 2012년에는 제주도 공무원 불자모임의 부회장이 됐다.  

성보 외호부터 신행 활동에도 열정적이었던 그가 2015년 1월1일 돌연 산으로 들어갔다. 60세가 되던 해였다. 명예퇴직 수당과 연금은 아내에게 돌렸다. 

열다섯살 정효가 법보전 앞에서 꿈꿨던 원각사는 아니지만 자그마한 조립식 주택에 ‘쌍계암’이라 이름 붙였다. 제주도 상징목인 녹나무로 만든 작은 부처님 한 분도 모셨다. 언제 어디서든 시민들 마음과 마주하겠다는 원력으로 스스로 상민(相民)이라는 호도 지었다. 

신행모임을 이어오다 보니 2016년 2월 서귀포불교대학원 학장으로 추대됐고, 그해 6월에는 서귀포불교대학원 초대원장이 됐다. 현재는 서귀포불교문화원장을 맡고 있다. 뿐만 아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자문위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제주도 수석부회장, 탐라문화유산보존회 이사장, 제주도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서귀포시 문화도시추진위원회 위원, 남영호기억과추모사업회 이사장 등 그에겐 주어진 수식어가 많다. 

윤 원장은 “살다보니 이것저것 소임이 많아졌다”면서 “능력에 비해 과분한 호칭들”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지난 수십년 간 주어진 순간순간에 정성을 다했음을 방증한다. 익숙함과 편안함에서 벗어나 다시 새롭고 고된 삶을 살고 있는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 불교인들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고 실천된다”며 “다함께 잘 사는 세상을 위해 남은 생을 회향하겠다”고 서원했다.

 제주=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08호 / 2021년 11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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