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2. 유마거사의 언설

침묵이 때로는 우레 소리와 같다

불이 묻는 문수보살 질문에
유마거사가 대침묵으로 답변
침묵은 입만 닫은 게 아니라
언어·개념 사라진 무분별지혜

수많은 불교경전 가운데에 가장 독특하고 파격적인 경전이 ‘유마경’이다. 우선 ‘유마경’은 법문이 부처님으로부터 설해지지 않고 유마힐이라는 거사로부터 설해진다. 거사의 이름으로 경전의 제목을 삼은 것부터가 참으로 특이하다. 또한 유마거사가 부처님의 십대제자는 물론 대승의 대보살의 견해까지 사정없이 비판한다는 점에서도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마경’은 교판 해석상 지양교(止揚敎)에 속하는 경전으로 분류한다. 지양교란 외도나 소승 더 나아가 불완전한 대승의 견해까지 억제하고 비판하는 교리이다. ‘유마경’의 핵심사상은 한마디로 불이법(不二法)이라 할 수 있다. 불이법은 세상의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상대와 대립을 초월하여 평등하다는 사상이다. 이는 불교의 근본교설인 연기법을 다르게 표현한 용어이다. 잠시,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불이’라는 용어에서 ‘이(二)’라는 글자이다. 이때 ‘이’를 둘이라는 숫자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이는 숫자개념의 두 가지가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상대와 대립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자칫 모든 법이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모든 법이 하나라고 해석하기 쉽다.

불이법이란 모든 존재의 본래 모습은 상대와 대립을 벗어난 평등하다는 의미이지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닌 것이다. 중생의 차원에서 보면 이 세상은 상대와 대립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너와 나, 높고 낮음, 태어남과 죽음, 옳고 그름, 귀함과 천함, 사랑과 미움 등이 그런가 하면 불교적으로는 부처와 중생, 번뇌와 보리, 유위와 무위, 정토와 지옥, 생사와 열반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는 미혹한 범부의 차원에서 그렇게 보인다. 부처님의 안목에서 보면 이러한 차별과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적으로는 상대적 대립 관계처럼 보여도 본질적으로는 무차별의 평등관계인 것이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마주하는 양변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과 대치되는 저것을 함께 벗어날 때 모든 존재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이를 다른 말로 중도진여법계(中道眞如法界)라고 한다.

‘유마경’의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을 보면 유마거사를 문병하기 위해 찾아온 모든 보살들이 저마다 불이의 법문을 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삶과 죽음, 나와 내 것, 받는 것과 받지 않는 것, 더러움과 깨끗함, 고요함과 시끄러움, 밝음과 어둠 등이 모두 불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보살들은 상수보살인 문수보살에게 어떤 것이 보살의 둘 아닌 경계냐고 질문을 한다. 이에 문수보살은 “일체 법은 말할 것도 볼 것도 알 것도 없으므로 모든 문답을 여의는 것을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한다. 

문수보살의 법문 요지는 일체의 모든 법은 실체가 없는 공한 것으로 보고 듣고 알았다 할지라도 진실에 있어서는 보고 듣고 알 바가 없는 것이며, 마침내는 불이법문이라는 언설과 설법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수보살의 눈에는 상대와 대립으로 이루어진 세상 그대로 중생들의 보고 듣고 아는 바에 관계없이 모든 분별과 언어를 넘어선 대평등 대적멸의 부처님 경계로 비친다.

하지만 문수보살의 이 같은 완벽한 불이법문도 유마거사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만다. 그 사정은 이렇다. 문수보살은 최종적으로 유마거사에게 어떤 것이 불이법문이냐고 질문한다. 그러자 유마거사는 눈을 감고 이내 입을 닫아버린다. 그 유명한 유마의 일묵(一黙) 법문이다. 모든 분별과 언어는 물론 부처의 설법마저도 용납지 않는 대침묵의 경계가 곧 불이의 세계라는 것이다.

중생들은 세상 모든 것을 언어와 개념으로 파악하려 한다. 언어와 개념은 마음이 만든 그림자이다. 세상의 본래 모습과는 관계없이 마음이 재구성해 놓은 것이 언어이며 개념이다. 상대와 대립은 이를 통해 만들어진다. 결국 침묵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만 닫은 게 아니다. 언어와 개념이 사라진 무분별의 지혜인 것이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611호 / 2021년 12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