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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생사 ④

기자명 박희택

죽음은 성숙한 원생 향하는 새로운 희망

죽을 때 밝은 안목‧공덕 갖추면
누구나 열반적정에 들 수 있어
죽음은 마냥 무상한 것 아니라
현생을 완성하는 절호의 기회

생사의 문제에서 삼법인의 의미는 실로 깊다. 불교의 존재론인 삼법인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진리의 도장[法印]이 찍힌 대로 존재함을 뜻한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법인은 물론이거니와, 열반적정을 지향하여야 한다는 법인은 의미하는 바 크다. 그렇기에 교학이 진전되면서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이 삼법인의 하나로 재정립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법인과 같이 필시 죽는 존재이다. 이 어김없는 사실을 눈앞에 두고 살면서도 죽음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허둥대며 살다가 죽음을 맞는 것만큼 어리석은 삶도 없을 것이다. 이제 ‘죽음수업’을 제대로 공부하여야 한다. 그 수업은 죽음이 열반적정의 지향과 직결됨을 종지(宗旨)로 한다.

“죽음의 신에게 잡힐 때 목숨을 버려야 하는데, 정말로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있는가? 죽을 때 무얼 가지고 가는가?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듯 무엇이 사람을 따라다닐까? 공덕과 악행 두 가지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지은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의 것이다. 죽을 때 이것을 가지고 간다. 마치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듯 이것이 항상 따라다닌다. 그러므로 사람은 선행을 닦아야 한다. 공덕은 저 세상에서 든든한 후원자이다(‘쌍윳따니까야’3).”

‘죽을 때 무얼 가지고 가는가?’ 하는(일아 역편,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민족사, 2008, 431쪽) 본원사적인 자기질문이 우리 삶의 푯대가 되어야 한다. 공덕을 닦고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닦아, 생사윤회의 고해(苦海)를 벗어나 해탈의 세계에 깃드니, 이것을 영원한 행복 곧 열반적정이라 한다. 일체의 번뇌 망상이 쉬고 일체가 청정하고 평화롭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진실로 알아차리고, 죽을 때 밝은 안목과 공덕을 가지고 가도록 준비해 나간다면 누구나 열반적정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대중열반’이라 한다. 대중열반의 길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죽음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듯이, 열반의 길도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열반적정을 지향하는 삶을 산다면 대중열반을 성취할 수가 있고, 열반적정의 죽음공부 없이 허송하게 산다면 대중열반을 성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석존 재세 시 붓다의 설법을 듣고 일시에 수많은 대중이 견성하는 ‘대중견성’을 얻었다. 대중견성의 특징은 죽어서가 아니라 이 몸 이대로의 현신으로 성불하는 현신성불(現身成佛)이었다. 초기불전은 대중견성 사례집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례가 많았다. 총 23회, 총인원 1만2500명에 달한다는 집계도 있다(김재영, 붓다의 대중견성운동, 도피안사, 2001, 165쪽). 대중견성은 문즉견성(聞則見性)이었고, 만인견성(萬人見性)이었으며, 현장견성(現場見性)이었다.

이 땅 신라에서도 현신성불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유사’ 탑상편에 보이는 경남 창원 남백월산 이성(二聖) 노힐부득 달달박박의 현신성도이다. 노힐부득이 미륵불로 현신성도하여 현신성도미륵전(現身成道彌勒展)에, 달달박박이 무량수불로 현신성도하여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에 머물면서 촌민들을 교화하였다. 이 외에도 욱면(감통편), 광덕과 엄장(감통편), 관기와 도성(피은편), 포천산의 다섯 비구(피은편) 등의 현신성불 사례가 보인다.

그런데 생전에 눈 밝은 인연을 가까이 하지 못하면 대중견성의 기회를 얻기 어려운데, 이 경우에도 성불의 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죽음을 대중열반으로 승화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부서지기 쉬운 이 몸과 이 생이 어떤 의미를 띨 수 있단 말인가?

이렇기에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마냥 무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생을 완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죽음을 삶의 대칭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생유(生有)-본유(本有)-사유(死有)-중유(中有)의 전 과정이 우리의 삶[有]이며, 사유는 본유를 이어가고 중유에 이어지는 과정인 것이다.

사람 죽지 않는 집이 없기에 모든 존재는 열반의 길을 차별 없이 꿈꿀 수 있다. 열반적정에 깃들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책임의 원칙에 따라 살아서 생전에 선업을 쌓아야 하며, 마침내 죽음에 이르러서 그 공덕으로 번뇌의 불꽃을 다 끄고서 열반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선물’이라기보다는 보다 성숙한 원생(願生)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희망’이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611호 / 2021년 12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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