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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21)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4)

요석공주 매개한 왕실과 김유신 관계는 정치적 해석 가능

원효의 사상은 유식설‧일심설‧유심설로 전환되며 사상적 변화
‘금강삼매론’ 저술에 대한 연기설화는 국왕과 관계 잘 보여줘
통일과정에서 사상적 통합은 통일주역과 원효의 공통 관심사

‘화엄연기회권-원효회’ 부분, 카마쿠라 시대, 종이에 색, 31.7×1,414.5cm, 일본 교토 고잔지. 이 부분에는 원효가 여러 승려들을 대상으로 설법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화엄연기회권-원효회’ 부분, 카마쿠라 시대, 종이에 색, 31.7×1,414.5cm, 일본 교토 고잔지. 이 부분에는 원효가 여러 승려들을 대상으로 설법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태종무열왕 8년(661) 원효의 45세 즈음 무덤 속에서의 깨달음과 요석공주와의 만남이라는 두 사건은 그의 불교적 삶의 방향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20여년 동안 원효는 저술활동과 대중화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서는 민간에 전승되는 설화를 모은 향전(鄕傳)을 인용하여 대중화운동의 모습을 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뒤부터 속인의 의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으므로 그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었다.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一切無碍人)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道出生死)’는 구절을 따서 무애호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원효는 이것을 가지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으며 돌아오니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나 옹기장이 무지몽매한 무리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無)를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컸다.”

민간에서 전승되는 원효의 모습은 저술가나 사상가로서보다는 중생 속으로 뛰어든 대중교화사로서의 활동이었다. 그러나 원효의 대중화운동은 불교포교와 대중교화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확고한 철학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사상사적인 의의를 갖게 되었다. 원효가 중생 속에서 외친 ‘무애인’은 ‘화엄경’권5 ‘보살명난품’에서 교설된 내용이다. 원효는 무애박을 두드리고 무애가를 부르고 무애무를 추면서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교화행을 펼쳤다. ‘거사’의 모습으로 중생 속에 뛰어들어 일승 화엄의 무애정신을 몸소 보여준 원효의 실천행은 화엄보살행이었으며, 나아가 여래출현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원효의 불교대중화운동은 무덤 속에서의 깨달음을 체험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선덕여왕대(632~647)인 20대 때 대중불교운동의 선구자인 혜공과 교유하면서 경전 저술의 자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중화운동에 눈을 뜬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깨달은 이후는 일심관이 확립됨으로 대중화운동은 질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원효는 처음에는 현장의 신유식 사상에 뜻을 두고 유학길에 올랐다가 ‘대승기신론’의 만법유심(萬法唯心)의 이치를 깨닫고 유학을 접었다. 그리고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후 거사의 모습으로 중생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원효의 일심사상은 여래장심에 머물지 않고 다시 화엄의 유심설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원효의 일심사상은 ‘유가사지론’의 유식설에서 ‘대승기신론’의 일심설로, 그리고 다시 ‘화엄경’의 유심설로 전환하는 사상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원효는 말년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찬술하다가 제4 ‘십회향품’에 이르러 집필을 중단하고 유심사상의 실천을 위해 중생 속으로 뛰어들었다. 원효의 대중불교화운동이 마침내 완성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송고승전’ 원효전에서는 원효가 당 유학을 포기한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삼국유사’의 원효불기조와는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중국 유학 시도의 사실이 생략된 반면에 ‘송고승전’에서는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사실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 불교대중화 활동만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송고승전’에서는 ‘금강삼매경론’ 저술의 연기설화를 중심 내용으로 하면서 그 앞에 원효의 행적을 좀 더 냉정한 시각으로 전해주고 있어서 대조된다. “일찍이 의상법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니, 현장 삼장의 자은의 문을 흠모한 것이다. 그 인연이 어그러지자 마음을 쉬고 노닐었다. 얼마 안 되어 말하는 것이 사납고 함부로 하였으며, 행적을 보이는 것이 빗나가고 거칠었다. 거사와 같이 주막과 기생집을 출입하였으며, (양나라의) 보지(保誌)처럼 금칼과 쇠지팡이를 지녔다. 혹은 소(疏)를 지어서 ‘화엄경’을 강설하기도 하였고, 혹은 거문고를 뜯으며 사우(祠宇)에서 즐기기도 하였다. 혹은 여염집에서 자기도 하였으며, 혹은 산이나 강가에서 좌선하기도 하였다. 마음 가는 대로 형편에 따를 뿐이었으니, 도무지 일정한 법식이 없었다. (중략) 처음에 원효는 자취를 나타냄에 정해진 것이 없었고, 사람을 교화하는 것도 일정하지 않았다. 혹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제하기도 하였고, 혹은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였다. 혹은 여러 곳에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였고, 혹은 여섯 방위(무든 곳)에 입멸할 것을 알리기도 하였다. 역시 배도(盃渡)나 보지의 부류라고 할 것이다. 그 신해(神解)한 성품에서 살펴보면 밝지 않은 것이 없었다.” 원효의 행적 가운데 저술과 대중교화 활동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는 없지만, 그의 행적은 그것보다 훨씬 다양하여 ‘원효불기(元曉不羈)’라는 ‘삼국유사’에서 붙인 편명과 같이 걸림이 없는 무애행(無碍行)이었던 것 같다.

그 동안 우리 역사학계나 불교계에서는 원효가 6두품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한계를 강조하고, 평민과 노비 등 하층인을 대상으로 하는 원효의 불교교화 활동을 주목한 나머지 국왕이나 정치권력과의 관계는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 그와 교류한 인물이나 교화 대상은 정치권력의 정상인 국왕으로부터 피지배계층인 평민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삼국통일의 주역을 담당하였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부자를 중심으로 하는 중대왕실, 그리고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 가문과의 관계는 요석공주를 매개로 하는 단순한 개인적 관계의 차원을 넘어서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가진 정치적 행위였다고 본다. 따라서 그 뒤의 원효의 행적은 정치적 자문이나 군사적 조언, 또는 학문과 교육 분야의 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하나로 요석공주의 자매와 부부가 된 김유신에게 군사적 조언을 해주어 무사히 귀환케 해준 사건을 들 수 있다.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난 다음해인 문무왕 2년(662)에 당의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보내온 암호를 해독해 주어 김유신의 군대를 무사히 귀환케 한 일이 있었다. ‘삼국유사’ 권2 태종춘추공조에 인용된 ‘고기’에 의하면, 김유신이 당군과 연합하려고 회기를 문의한 바, 소정방은 암호로 난새와 송아지 두 동물을 그려 보내와서 원효에게 사람을 보내 그 뜻을 물었더니, ‘빨리 군사를 돌이키라’는 뜻이라고 해석해 주어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는데, ‘삼국사기’ 문무왕 2년조에도 김유신이 당군에게 군량미를 전해주자마자 당군은 바로 철군하였고, 그에 따라 신라군도 급히 회군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어서 원효 행적에 대한 신빙성을 높여주었다.

원효의 행적 가운데서 국왕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은 ‘금강삼매경론’의 저술과 강의라고 할 수 있다. ‘송고승전’ 원효전은 ‘금강삼매경론’의 저술과 강의에 관한 설화가 전체에서 70% 이상의 분량을 차지할 정도로 이 사건은 중요시되었다. 우선 ‘송고승전’ 원효전의 ‘금강삼매경’ 주석과 강의에 얽힌 연기설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 국왕(문무왕)이 백좌인왕경대회를 설치하고 두루 대덕스님을 찾았는데, 원효의 고향(상주)에서는 명망을 들어 그를 천거하였으나, 여러 대덕스님들이 그 사람됨을 들어 왕에게 참소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부인(자의왕후?)이 머리에 악성종기가 나서 의사의 치료와 사당에서의 기도에도 효험이 없었고, 무당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의술을 구해 오게 했다. 사신은 바다에서 용궁으로 안내되어 용왕을 만났는데, 용왕의 이름은 금해(鈐海)였으며, 그로부터 신라의 왕비가 청제(靑帝, 봄을 관장하는 신)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용왕은 30장 쯤 되는 중첩되고 흩어진 ‘금강삼매경’을 주면서 대안에게 차례를 매겨 꿰매게 하고 원효에게 소를 지어 강의하게 하면 왕비의 병이 낫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신이 귀국하니, 먼저 저자거리의 대안에게 보내어 차례대로 묶게 하고, 고향 상주에 있던 원효에게 강의하게 하였는데, 원효는 소가 끄는 수레에서 두 뿔 사이에 붓과 벼루를 비치하고 ‘소’ 5권을 지어 황룡사에서의 강의 날을 정하였다. 그때 박덕한 무리들이 ‘소’를 훔쳐갔기 때문에 사흘을 연기하여 다시 ‘소’ 3권을 만들었다. 원효는 왕과 신하, 스님과 속인들에게 강의를 마치고, ‘지난 날 100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에는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아침 하나의 들보를 놓는 곳에는 오직 나 홀로 가능하구나’ 하고 외치니, 그때 모든 이름 높은 대덕들이 얼굴을 숙여 부끄러워하고 엎드려 참회하였다.”

이상의 설화에 첫째로 문제되는 것은 ‘금강삼매경’의 출현 지역과 찬술자 문제인데, 신라인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견해까지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있으나, 쉽게 결론내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경전의 출현 배경에서도 중국과 신라의 불교 상황에 대한 설명 이외에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인 김유신의 역할을 의심하는 주장까지 제기되었으나, 만족할 만한 설명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둘째 소가 끄는 수레에서 두 뿔 사이에 붓과 벼루를 비치하고 ‘소’를 지었다는 것은 ‘금강삼매경’의 주제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이각(二覺)임을 상징한 표현이다. 셋째 ‘금강삼매경’의 편집과 주석에 참여한 대안과 원효 등은 대중불교운동가이자 불교사상에도 일가견을 가진 학자들로서 선배인 혜공, 동료인 사복 등과 더불어 동류의식을 가진 집단이 성립되어 있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평민이나 노비 출신들이 포함되었고, 출가와 재가를 넘나들며 저잣거리에서 활약하는 인물들도 등장하였다. 넷째 원효로 대표되는 집단을 거부하고 배척하려는 다수의 승려들이 있었다. 앞서 원효를 미워하여 백고좌회의 참석을 거부하였고, 중간에 원효가 새로 집필한 ‘소’ 5권을 훔쳐갔으며, 마지막에 원효가 강의를 마치면서 일갈하자, 이름 높은 대덕들이 부끄러워하여 참회하였다고 하는데, 100개의 서까래는 백고좌회에 참석한 대덕, 그리고 원효의 ‘소’를 훔쳐간 박덕한 무리들, 그리고 원효의 일갈에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는 이름 높은 대덕들이었다. 원효 등을 꺼려한 이들 대덕들은 황룡사 등의 대찰을 무대로 하여 불교교단을 주도하고 있던 진골귀족 출신의 비구들로서 자장 등에 의해 정비된 계율을 엄격하게 고수하려는 교단의 주류적인 인물들이었다. 원효가 ‘범망경’의 대승보살계에 의거해서 보살계의 중죄를 범하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자고심(自高心) 등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여 비판한 대상이 바로 이들 비구들이었음은 물론이다. 다섯째 국왕은 결국 ‘금강삼매경’의 편집은 왕궁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저잣거리의 대안에게, 그리고 주석과 강의는 원효에게 맡겼는데, 당시 교단을 주도하고 있던 진골 출신 비구들과 대척 관계에 있던 원효・대안 등과 국왕은 특별한 관계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7세기 전반기부터 진골귀족 중심의 계급적 편향성과 왕도 중심의 지역적 편중성을 극복하고, 삼국통일과정에서 3국 주민의 통합을 이루어야 하는 사회적 과제, 그리고 다양하게 전래된 불교사상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요구되는 사상적 과제에 부응하려는 일군의 불교인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삼국통일과정에서 사회적 사상적 통합을 염원하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에게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고, 황룡사에서의 ‘금강삼매경’ 강의를 담당하였다는 설화는 바로 원효와 국왕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설명해주는 이야기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12호 / 2021년 12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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