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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가르침 받들어 백성 위하고 민심 통합하는 전륜성왕 지향

새해특집 - 불교에서 배우는 통치의 지혜
 [불교와 정치] 2. 한국사의 이상적 호불임금

법흥왕·문무왕·왕건·문종 등 대표적…세종·세조·정조도 호불
학문·덕행 뛰어난 스님을 왕과 나라 스승인 왕사·국사로 책봉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국가지도자들이 받들어야 할 유산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겠다며 불교식 화장으로 동해 대왕암에 묻혔다. 문화재청 제공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겠다며 불교식 화장으로 동해 대왕암에 묻혔다. 문화재청 제공

한국 1700년의 불교역사 속에서 호불 군주는 4세기 무렵 불교가 전래된 이후 14세기 말 성리학을 국시로 한 조선왕조의 성립 이전 시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 전래 이후 조선 초까지 1000여년 기간 재위했던 군주들은 호불적이었다고 하겠지만,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도교를 장려했던 당시의 보장왕이나 고려 초 유학자 최승로의 시무상소를 대부분 받아들인 성종, 고려중기 도교의 관사인 복원궁을 설치했던 예종 등은 호불 군주로 간주하기 어렵다. 숭유억불시기인 조선 초 태조 이성계의 아들 태종과 손자 세종이 호불 군주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는데, 불교계 탄압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지만 세종은 말년에 호불로 돌아섰기 때문에 호불 군주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 이후 조선의 역대 왕은 성리학적 시책을 폈기 때문에 호불 군주로 부르기 어렵지만, 세조와 정조는 호불적 군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본 글에서 다룰 호불 군주는 불교를 크게 중흥하고자 했던 군주를 대상으로 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호불 군주는 불교를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공인하였지만 그 이후 삼국 통합 전까지를 불교식 왕명시기로 이끌게 하였던 법흥왕 등을 들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중고기라는 시기를 설정했을 만큼 중요하게 간주하였다. 석가 진종설에 의하여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인 전륜성왕을 표방했던 진평왕과 그의 비는 석가의 부모인 백정과 마야라고 자칭했을 정도이다. 당시 원광 스님이 당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신라의 청년들은 가르침을 청했고 불교의 5계를 생활에 적용시킨 세속오계를 주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라 청년 화랑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인도의 전륜성왕이라 할 아쇼카왕과 비견되는 진흥왕은 신라 최대의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신라 청년 가운데 우수한 자들을 뽑아 화랑도 제도를 확립시켰다.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을 이루었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겠다며 불교식 화장으로 동해 대왕암에 묻혔으며 후대의 왕들도 이를 뒤좇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신라 천년의 찬란한 불교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재상 김대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왕의 치적을 펼친 결과이다.

자장 스님은 당에서 귀국 후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게 하여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게 하였다. 그 영향으로 고려 왕조 건국 직후 후삼국 통합이 이루어지던 때 태조 왕건은 개경과 서경에 각기 7층탑과 9층탑을 세우기에 이른다. 의상 스님은 문무왕에게 다음과 같이 한 가르침을 주었다. 문무왕이 즉위 21년에 경주의 성을 수축하여 민의 고역이 되자, 의상 스님은 축성 중지를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왕의 정치가 밝으면 풀언덕으로 경계를 정해놓는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으려 하지 않아서 재앙을 면하여 복이 되지만, 정치가 바르지 못하면 여러 사람을 수고스럽게 하여 장성을 쌓더라도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문무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가르침은 위정자들이 표본으로 삼을 만하다. 문무왕이 통일 후 백제의 경흥 스님을 나라를 대표하는 국로로 모셔와 후백제 지역을 아울렀던 것도 불교의 가르침을 받든 사례다.

태조 왕건은 풍수도참사상의 비조로 추앙되고 있는 선종승 선각국사 도선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국가비보사상으로 국가를 운용했다. 이른바 태조의 ‘훈요십조’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데 전국의 사찰 및 탑, 불상을 전국에 배치하여 중앙과 지방을 다스렸다. 1년 중 가장 큰 행사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개최하게 하여 국민적 통합을 유도하였으며, 특히 팔관회에서 주변국의 조하를 받는 황제국 지향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이러한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 고려의 국가라고 할 풍입송이다. 즉, “해동의 천자는 당대의 황제이며 부처이니, 하늘을 보조하고 조화를 돕는다”라고 시작하는 노래이다. 불교계의 고승 가운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스님을 왕의 스승인 왕사와 나라의 스승인 국사에 책봉하였으며, 이 제도는 조선 건국 초까지 시행되었다. 왕은 왕사와 국사의 책봉식에서 아홉 번이나 절을 하는 예의를 올렸다. 신라 자장 스님이 승관제를 실시한 바 있지만 고려시대에 왕은 국사와 왕사의 자문을 받아 정치를 베풀었으며, 승려의 과거제도라고 할 승과를 실시하였다. 고려의 전성기인 문종과 숙종 시기는 불교의 전성을 구가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문종은 최대의 사찰인 흥왕사를 창건하고 숙종은 전 왕조 시기의 대표적 인물을 국가적으로 추념하였다. 바로 원효 스님을 화쟁국사, 의상 스님을 원교국사로 추켜올려 국민의 정신적 표상이 되게 하였다. 

원 제국의 간섭에서 일탈하고자 했던 공민왕은 반제 자주적 개혁을 이루기 위해 보우를 왕사로 책봉하여 선종계를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화엄종계의 신돈과 천희 스님을 왕사로 책봉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공민왕은 석가의 삼촌의 108대 후손인 인도 지공 스님의 두골이 개경에 도착하자 머리에 이고 행진 한 바 있다. 그리고 지공 스님의 대표적 제자 나옹 스님을 왕사로 책봉하여 개혁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던 송헌거사 태조 이성계는 건국 초 첫 번째 생일날 무학을 왕사로 책봉하는 등 불교의 가르침을 펴고자 하였다. 무학 스님은 팔만가지 행 가운데 가장 으뜸인 영아행을 베풀 것을 제안하여 억울하게 갇힌 죄수를 풀어주는 등 불교의 자비를 베풀기도 하였다. 유자들이 불교를 탄압하려 하자 이성계는 “이색과 같은 대 유학자도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너희들이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태종과 세종은 역사상 불교계를 가장 심하게 탄압하였지만 세종은 말년에 사랑하는 왕자 둘과 왕비가 돌아가자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 세종은 집현전을 두어 우수한 신예 학자들을 양성하였으며, 일정 기간 동안 사찰에서 휴가를 주어 연구케 하는 사가독서제도 실시한 바 있다. 특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과 소통하고자 하였는데 아들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을 간행하게 하고 자신이 ‘월인천강지곡’을 짓는 등 수많은 불전을 언해하였다. 

수양대군은 즉위하여 부왕 세종의 한글 창제를 널리 보급하고 간경도감을 두어 ‘능엄경’ 등 불교경전을 언해하였다. 여기에는 세조가 삼화상으로 존경하여 받든 혜각존자 신미 스님과 그의 제자 학조 스님, 학열 스님 등이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조는 묘각화상 수미 스님을 왕사로 받들며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국가의 틀을 완성하고자 하였다.

억불시책을 편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시 구국의 선봉에 섰던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 스님과 영규 스님 또는 처영 스님들을 추념하기 위하여 이들에 대한 국가제사도 지내게 하였다. 특히 정조는 무학 스님을 개국원훈이라고 추켜올리고, 무학 스님의 스승 나옹 스님과 지공 스님에게 삼화상 교서를 내리고 석왕사에서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면서 규장각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여 세종시대의 황금문화를 재현하고자 하면서도 세계 최초의 계획도시라고 할 화성을 짓고 용주사를 중창하였다. 정조는 용주사에 봉안한 봉불기복제라는 글에서 자신이 전륜성왕이라고 하는 등 불교의 가르침을 받들기도 하였다. 

황인규동국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황인규동국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이와 같이 한국역사상 호불 군주는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 법흥왕 이후 이상적인 군주상인 전륜성왕이 되고자 하였으며, 황룡사 9층탑을 세워 통일염원을 강화시켰다. 나라의 스승인 국사와 왕사를 책봉하고 국민의 정신적 표상이 되게 하여 정책을 펴고자 하였다. 세시풍속 가운데 연등회와 팔관회를 국가 최대행사로 개최하여 문화적 통합성을 이루려 하였다. 전 시대의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을 국가적·정신적 인물로 선정하여 국민의 중심을 이루게 하였다. 특히 세종과 세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한글을 창제하여 혜각존자 신미 스님 등을 삼화상으로 받들며 한글 창제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다. 묘각화상 수미 스님을 왕사로 받들며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국가의 틀을 완성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개혁정책을 펼치며 용주사를 중창하는 등 불교의 가르침을 받들었다. 이러한 역사 속 호불 군주들이 보여준 불교의 가르침에 의한 시책은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의 미래 시기에도 국가 지도자들이 받들어야 할 소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1615호 / 2022년 1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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