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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지금 여기서 보살사상이 필요한가?

이 시대 필요한 건 보살 정신으로 살려는 ‘용기’

상황 극복할 힘은 깨어있는 개인으로 시작돼…보살 중요한 이유
​​​​​​​대상 본질 비어있다는 통찰 있어도 고통 받는 중생 존재 공감해
세속제 차원이라도 중생의 고통 나누려는 비심과 연민심은 당연

간다라 보살상, 2~3세기, 편암, 높이 116.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간다라 보살상, 2~3세기, 편암, 높이 116.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022년도를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해본다. 지난 2년간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된 세계적인 코로나19의 유행을 겪으면서 나는 한 명의 인문학자로서 그리고 불교학자로서 진정한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곤 했다.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코로나19의 강한 전파력과 백신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다양한 변이는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만, 이는 결국 붓다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화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질병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제는 언젠가 만들어지겠지만, 문제는 우리가 계속해서 두 번째 화살을 맞고 있다는 점이다. 

온 세계가 여행자와 화물수송으로 촘촘히 얽혀있는 상황에서 어느 사회와 국가도 완전히 고립된 섬처럼 지낼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구태의연하게 자신과 자신의 국가만을 고려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따른 2차적 확산이라는 두 번째 화살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의 징후 앞에서도 인류는 여전히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듯이 보인다. 

위기에 대한 무감각은 기후문제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모든 과학데이터는 이대로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진행된다면 지구적 차원에서 파멸적인 상황이 곧 도래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는 기업과 국가의 문제일 뿐이고,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후손들과 미래의 중생들을 위해 현재의 편리함을 희생하고자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다음과 같은 이유에 상호연결된 세계에 살고 있지만 마치 독립된 모나드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를 어느 하나의 책임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겠지만, 나는 우리 시대 정신적 위기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유물론적, 물리주의적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불교가 제시했던 자신의 욕망 억제와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연민심, 내적인 정신적 완성과 이를 위한 수행, 모든 생명체와 자연에 대한 평등감 등의 고귀한 덕목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정신적으로 깨어있는 개인의 노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믿으며, 이런 깨어있는 개인이야말로 불교전통이 그렇게 상찬했던 보살 관념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에서 나는 이번 연재인 ‘대승의 보살사상’에서 보살사상의 형성과 발전, 사상 내용 등에 대해 내가 아는 한 텍스트에 의거해 정리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보살’이란 말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일상 용례를 제외하면 크게 ‘천상적 보살’과 ‘수행자 보살’의 두 가지 의미로 요약될 수 있겠다. ‘천상적 보살’이란 관세음보살이나 미륵보살과 같은 중생의 구제를 위한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특히 대승불전에서 등장하며, ‘수행자 보살’이란 완전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를 가리킨다. 

연민심이나 자애심과 같은 어떤 특정한 심리적 힘의 상징으로서 나타나는 첫 번째 의미에서의 보살 관념이 많은 이들에게 보다 친숙하고 종교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필한다고 믿지만, 나는 단지 몇몇 천상적 보살들에 대해서만 간략히 다룰 것이다. 

반면 두 번째 의미의 보살 관념에 대해서 보다 중점을 두고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가 왜 우리의 마음을 붓다의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하는지 또 이를 위한 노하우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하우의 과정과 의의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살사상이 단지 흘러가버린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불자들에게 불교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었고, ‘가장 위대한 유산’이며,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런 인식에서 비로소 우리가 처한 현금의 사회적, 정신적 상황 속에서 대승불교가 꿈꾸었던 완전한 깨달음과 중생구제라는 보살의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또 이를 통해 불교는 우리 의식을 확장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으로서 다시금 작동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위에서 보살의 목표가 완전한 깨달음과 중생구제라고 언급했지만, 불교전통에서는 이를 일반적으로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으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이 표현에서 오해하기 쉬운 두 가지 점이 있다. 

하나는 보리(菩提, bodhi)를 대승의 맥락에서 적절히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보리는 붓다의 보리이지 성문이나 연각의 보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승에서 후자는 오직 자리(自利) 추구의 결과로 간주됐던 반면, 붓다의 보리는 자리와 이타의 결과로 간주됨으로써 두 가지 보리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상(上)과 하(下)라는 표현이 결코 가치평가를 나타내지 않고, 단지 발심의 논리적 선후관계를 보여줄 뿐이라고 이해하거나, 또는 완전한 깨달음이나 붓다의 상태 증득이라는 목표가 먼저 제시되고 이를 실현시키는 방법으로서 일체중생에 대한 차별 없는 연민심의 실천이 요구된다고 보는 것이다. 

상구보리의 실현이 대승의 공성 경험에 의해 이뤄지고, 하화중생이 대비(大悲)에 의거해 실현된다는 점에서 양자는 공성과 대비로 표현되기도 한다. 

불교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는 너무 당연한 설명이라고 보이겠지만, 공성과 대비가 함축하는 의미를 고려할 때 이 문제는 언뜻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자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성’은 관찰되는 대상의 본질이 비어있음을 아는 통찰로서 어떤 것도 존재자로 정립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비심’(悲心)이나 연민심은 중생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그들의 고통을 나누려는 심적 태도로 고통받는 중생들 존재가 세속제의 차원이라고 해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대승의 이제(二諦)의 교설에서 보이는 긴장감이 드러난다. 

이런 긴장감은 보통 대승문헌에서 중생들에 대한 연민으로 보살은 열반에 들어가지 않고 공성의 통찰 때문에 생사의 세계에서도 염오되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정형화돼 표현되지만, 나는 이러한 내적 긴장감 속에서 행동해야 하는 보살은 마치 두 심연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니체의 초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보살 정신에 따라 살아가려는 용기이다. 보살이란 바로 이런 ‘용기를 가진 자’이며, 이런 용기는 삶의 모순적 상황과 분분한 이론의 그물망 속에서도 보살행의 목표와 과정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sdahn@snu.ac.kr
 

[1615호 / 2022년 1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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