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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재를 시작하며

기자명 진우 스님

금강경은 세간‧출세간을 가르는 관문…제대로 알면 피안에 도달

600부 반야경 중 577번째 경으로 부처님 교설 중 최고 가르침 
‘이러히’라는 대명사 속에 ‘금강경’ 요체인 공의 도리를 드러내
‘한때’라는 건 부처님 교설이 시간 초월해 항상 지금 존재 의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49년간 설법(說法)을 하셨다. 처음 ‘화엄경(華嚴經)’을 21일간 설법하시고, ‘아함경(阿含經)’ 12년, ‘방등경’(方等經, 유마경, 승만경, 금광명경, 능가경, 무량수경 등) 8년, ‘금강경’(金剛經, 반야부(般若部) 600권의 대반야경) 21년, ‘법화경(法華經)’ 8년, ‘열반경(涅槃經)’ 하루다.

설법5시(時)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무려 21년간의 긴 세월에 걸쳐 네 곳의 장소를 옮기면서 열여섯 회의 장광설(長廣舌)로 600부 반야경을 설하셨다. 그 가운데 ‘금강경’은 제557권 째 경으로서, 둘째 장소, 9회째 법회에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그만큼 불교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 설법 가운데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반야경인 ‘금강경’을 연재한다는 것은 매우 주제넘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의 사고(思考)에 조금이나마 부합하기 위해 서투른 연재를 시작하면서 많은 양해와 함께 같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금강경’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역사적 사실과 변천과정 등은 많은 자료가 두루 알려져 있으니 각자가 찾아보기로 하고 일단 생략한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에 있어서 ‘금강경’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아, 연재하는 중이라도 빠진 점이 있거나,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지체하지 마시고 댓글을 통해 문의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금강경’은 가히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가르는 관문(關門)과 같은 경이다. ‘금강경’을 제대로만 알게 된다면 세간의 복잡하고 어지러운, 그래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도탄(塗炭)을 완전히 빠져나와서, 환희롭고 이상적인 출세간의 피안(彼岸)에 흔연히 도달할 것이다.

지금부터 연재하는 ‘금강경’은 소납이 어릴 때 너무나 감명을 받고 진정한 출가(出家)의 기반이 되었던, 1930년대 소천선사(韶天禪師)의 ‘금강경 강의'를 대부분 참고하여 ‘붙임’을 통해 요약 정리하면서, 현대인들의 사고(思考)에 맞도록 ‘덧붙임'이라는 형식으로 부연 설명하였다.

다만, 부탁드릴 것은 ‘금강경’ 연재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한번 허투루 읽지 않으시길 간절히 바란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그 속에 신비한 기운이 청량(淸凉)하게 서려 있기 때문이니, 성심껏 공부하여 크나큰 영험을 맛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 법회가 열린 이유)

여시아문(如是我聞)
이러히 내가 들었다

‘이러히’라 함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 즉, 살아있는 본체(本體)와 심체(心體), 골격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무량한 법(法)이 포함되어 있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그대로 비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누가 들었는가? 부처님의 10대 제자인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존자(須菩提尊者)와의 대화를, 역시 10대 제자인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존자(阿難尊者)가 그대로 들어서 전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경 머리에 “내가 ‘이러히’ 들었던 것을 고스란히 전함이요, 내가 지어낸 말이 절대 아니”라고 함이다. 그러함에 ‘이러히’ 라고 하는 것은 ‘금강경’ 전체의 뜻을 제일구(第一句)의 한마디로서 드러냄이다. 또 ‘이러히’라 함은 금강반야바라밀의 진리를 하나의 대명사로서 말 밖의 말, 생각 밖의 생각을 이끌어 냄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이러히 내가 들었다’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보이시려는 삼공처(三空處), 즉 아공(我空) 법공(法空) 공공(空空)인 청정본성(淸淨本性)을 내가 들었다는 표현이다. 또 삼공처(三空處)의 동작을 형용하여 말이 아닌 말을 들었다는 것이고 본체 아닌 본체로서, 작용 아닌 작용으로 내가 즉 소식이요, 들은 바가 소식이라는 것이다. 진아(청정본성)인 내가, 진아(眞我)의 성품이 일어나서 들었다는 것이 아난존자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러히’의 뜻을 안 자이면 ‘금강경’의 본뜻을 아는 사람이니 즉, 청정본성으로서 청정한 말 밖의 말을 가르치시려는 것이 부처님의 반야바라밀이다. 

지금까지의 해석을 처음 듣는 이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덧붙이자면, ‘이렇게 내가 들었다’고 하는 이 한마디 속에도 엄청난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들었다’의 이렇게(이러히)라 함은 아난존자 자신이 마음을 깨닫지 않고 들었다면 무슨 말씀이 오고 가는지조차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아난존자는 이미 깨달은 마음으로 들었으므로 이렇게 한 치 오차 없이 정확하게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억한다고 해서 옮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히’ 속에 이미 ‘금강경’의 본체가 스며져 있고, 그 본체 자체가 삼공처(三空處)에 속하는 것이므로, 즉 공(空) 또한 공이므로 이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나, 그러함에 ‘금강경’의 공도리(空道理)가 더욱 빛을 발하여 작용함일 것이다. 그래서 공(空)을 말하는데 이 또한 공이고, 이 또한 공이 다시 공(空)이 되므로, 공이라고 하는 즉시 또 공이 되는 것을 이름하여 본체(本體)의 체(體)라 하는 것이고 이 본체인 공(空)이 부처님과 수보리, 그리고 이를 깨친 마음으로 들은 아난존자, 이 셋이 말하고 듣는 것을 작용 즉 용(用)이라 한다. 

이를 합쳐 체용(體用)이라 하는데 체(體)를 모르면 혼령이요, 용(用)을 모르면 송장과 같아서 체용(體用)을 모르면 혼미와 망각(妄覺)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이러히’ 또는 ‘이렇게’ 라는 대명사 속에는 ‘금강경’의 요체인 공(空)의 도리와 이 공의 도리를 말하고 듣는 작용을 하는 것이니 이러한 체(體)와 용(用)을 통하여 부처님의 본자성(本自性)을 보고 깨달아야 한다. 하나 더 쉽게 비유하자면 움직이는 모든 것은 본래 공(空)이어서 집착할 이유가 없을 것이나 그래도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것을 엄연히 보고 듣고 감응하는 고로 여기에 감성(感性)과 정(情)을 붙이게 되면 인과(因果)를 면치 못할 것이나, 움직이는 작용 즉, 용(用)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게 되면, 체용(體用)만 살아 움직일 뿐, 괴로움의 과보(果報)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시 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스님 천 이백 오십 대중과 함께 계시었다.

‘한때’라는 것은 이 경(經)을 설하시고자 한때이고, ‘불(佛)’은 석가세존(釋迦世尊)이시며 또 마음을 깨쳤다는 뜻이다. ‘기수(祇樹)’는 사위국(舍衛國)태자 이름이 기타이고, 기타태자가 심은 나무라는 의미이며 ‘사위국’은 이 경을 설법하실 때의 나라 이름이다. ‘급고독(給孤獨)’은 사위국 노재상(老宰相)으로서 돈이 많은 자선가인 수달다 장자의 별칭이 급고독이다. 이 별명은 고독한 사람을 잘 구해 준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원(園)’을 붙인 것은, 급고독 수달다 재상이 기타태자로부터 동산을 빌려 설법전을 세웠으므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한다. ‘비구(比丘)’는 지금의 스님으로서 구걸 즉, 탁발을 하면서 수행하는 이를 가리킨다. 왜 꼭 구걸하며 수행을 할까? 부처님께 법을 구걸하여 깨달음을 얻을 량이고, 시주자(施主者)에게 의식을 구걸하여 식량으로 삼는 동시에 시주하는 중생에게 복(福)을 짓게 함이다. 왜 ‘일시(一時), 한때’라고 했을까? 부처님의 말씀인 법경(法經)은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지금 존재한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는 물리적인 시간이 모두 다름이다. 시방무량국토(十方無量國土)의 무량중생을 향한 법이기 때문이다. 사천왕천(四天王天)의 하루는 인간의 50년이고, 도리천(忉利天)의 하루는 인간의 100년에 해당한다. 그러니 모두에게 한때인 것이다. ‘불(佛)’은 마음을 깨쳤다는 뜻인데 마음의 무엇을 깨쳤을까? 부처도 중생도 없음을 깨쳤다. 부처는 중생을 낳고 중생은 부처를 낳으니 이러한 분별(分別) 인과(因果)를 완전히 멸했다는 뜻이다. 그러함에 생사(生死)도, 시비(是非)도, 고락(苦樂)도, 극락과 지옥도 없으니, 영원불멸하여 항상 일체의 장애 없이 깨어 있음이다.

그런데, 마음 깨침에 있어서도 차별이 있다. 불(佛)은 대각과 정각을 이룬 상태이다. 성문(聲聞)연각(緣覺)은 깨치기는 깨쳤다고 할 수 있으나 완전히 깨친 것은 아니다. 본래 깨침에는 크고 작거나, 올바르다 그르다 하는 것이 전혀 없으니, 만약 깨쳤다 함은 못 깨쳤다는 인과(因果)에 걸리고, 크게 깨쳤다 하면 이미 작게 깨침이 되며, 작게 깨쳤다 해도 작은 깨침이 되고, 깨침 없음을 깨쳤다 해도 작은 깨침이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깨침이 무엇인가는 앞으로 적나라하게 설명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sansng@hanmail.net

 

진우 스님은

백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78년 보현사에서 관응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98년 통도사에서 청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신흥사, 용흥사, 백양사 주지와 재심호계위원, 총무원 사서실장, 호법부장, 기획실장, 총무부장, 총무원장 권한대행 등을 역임했으며 2019년 제8대 조계종 교육원장에 선출돼, 현재 조계종 승가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1615호 / 2022년 1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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