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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

경전은 마음의 병 치유 위해 부처님께서 내리신 약방문(藥方文)입니다

중생에겐 몸의 병보다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의 병 많아
화엄산림 법문 듣는데 그치지 말고 마음 치료약 삼아야
약을 믿고 복용해 마음의 병 낫도록 하는 것은 각자 몫

코로나19로 어려운 중에도 이 화엄산림을 무장무애(無障無碍) 환희원만(歡喜圓滿)하게 성취(成就)하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또 감사합니다. 통도사 화엄산림의 시작은 자장 스님의 통도사 창건 시기부터라고 봅니다. 그 이후로 많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통도사에서는 화엄산림이 잘 이어질 때도 있었고, 또 난리를 만나든지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끊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근래에 와서는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화엄산림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우주 만상을 상이 없는 상으로 말씀하시고 고구정녕하게 분석하여 설명하신 경전입니다. 그리고 통도사는 가람배치가 구품연대(九品蓮臺)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노전에 상‧중‧하 삼법당이 있고, 중노전‧하노전에도 각각 삼법당이 있어서 경전에 담긴 내용이 형상으로 표현된 도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화엄산림을 통해 ‘화엄경’ 설법을 듣고 구품연대로 구성된 통도사 도량을 참배하면서 억겁에 지은 죄가 일시에, 화롯불에 눈 녹듯이 녹아버리기를 염원합니다. 

오늘은 한 달간 진행된 화엄산림을 회향하는 날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동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훌륭한 스님들의 법문을 매일같이 들으셨습니다. ‘화엄경’ 설법은 여러 스님께서 잘 해주셨다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화엄산림(華嚴山林)’이라고 할 때 산림(山林)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살림’에 대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나라에도 살림이 있고 가정에도 살림이 있고 개인도 살림이고 회사도 살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살림이라는 말은 영어나 중국어나 일본어로 직역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이 공부하는 것을 ‘산림’이라고 표현합니다. ‘스님들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가?’ 이것을 ‘살림살이가 어떠한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살림살이’의 어원은 바로 ‘산림’에 있습니다. 화엄산림, 법화산림, 수계산림, 보살계산림, 이렇게 절에서 부르는 ‘산림’이라는 말이 천지사방에 퍼져서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무엇이든지 ‘살림’이라고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금은 어디 없이 다 살림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만, 큰 범위에서 보면 사찰에서 쓰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살림이라는 용어는 아마 사찰에서, 특히 통도사의 ‘화엄산림’에서 파생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그래도 우리 불교도는 저와 같이 생각하셔도 좋겠습니다. 그만큼 자부심을 지니고 통도사 화엄산림에 동참하셔서 원만히 잘 회향하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 ‘산림’에 담긴 의미를 좀 더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산림은 뫼 산(山) 자에 수풀 림(林) 자입니다. 산은 ‘최절인아산(崔折人我山)’하고, 이러한 뜻입니다. ‘인아산’은 나다, 너다, 이러한 상이 저 산꼭대기처럼 높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탁 깎아서 평지를 만들고 옥토를 만들어서, 림은 ‘장양공덕림(長養功德林)’이라, 공덕의 숲을 키운다, 이 말입니다. 공덕의 숲을 키워 놓으면 온갖 벌과 나비가 날아들고 새도 날아들어서 중생을 복되게 합니다. 그래서 산림이라는 말 자체가 ‘최절인아산 장양공덕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아산’을 이 시점에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자기 잘난 것만 앞세우며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나다, 너다, 이것이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구업(口業)을 많이 짓습니다. 남을 비방하는 것 자체가 구업입니다. 

구시상인부(口是傷人斧)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입이라는 것은 사람을 상처 내는 도끼와 같다는 뜻입니다. 입 도끼를 가지고 막 쪼아대는 것입니다. 사정없이,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입 도끼로 막 쪼아대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이 화엄산림에 동참하고 있다면 적어도 이 뜻을 새겨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 주위의 여러 도반에게도 이 의미를 알려서 입 도끼를 조심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나다, 너다, 하는 ‘인아산’은 한정 없이 높습니다. 그래서 끝이 없습니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서 옛날에는 석상(石像)을 하나 모셔서 돌로 사람 모양을 만들고 돌사람의 입에다가 세 바늘을 꿰매었다고 합니다. 이를 삼함기구(三緘其口)라, 세 번을 입을 끌어매고, 이명기배왈(而銘其背曰), 등에다가 글로 써 붙였다고 합니다. 뭐라고 써 붙였는가. 고지신언인야(古之愼言人也)라, ‘옛날에 말조심하던 사람이다’, 이런 뜻입니다. 

돌사람은 말도 하지 않는데 왜 입을 세 번이나 끌어매었는가, 그 상징적인 뜻을 아셔야 합니다. 석상은 말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입을 세 번이나 끌어맬 정도인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 입을 얼마나 조심해야 하겠는가, 그런 뜻입니다. 

선원에는 삼함(三緘)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스님들께서 수행하는 큰 방의 앉는 자리에 백운(白雲)이 있고, 청산(靑山)이 있고, 지전(知殿)이 있습니다. 그리고 삼함이 있습니다. 석 삼(三) 자에 봉함, 함구, 끌어맨다는 함(緘) 자입니다. 곧 세 번 입을 끌어매는 소임이라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수행에 있어서 인아산을 무너뜨리고 공덕림을 잘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경책이 담긴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너무 입을 함부로 놀립니다. 입을 너무 함부로 놀리는 것은 병통입니다. ‘입을 함부로 놀리는 너희 인간들 맛 좀 봐라.’ 그래서 코로나19가 온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지금 모두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도록 만들어서 입을 다 막았겠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코로나19보다 더한 마음의 병을 자꾸 일으키고 있습니다. 몸의 병은 회복되기라도 하지만 마음의 병은 좀처럼 낫지 않습니다. 중생에게는 코로나19와 같이 두려운,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의 병이 많습니다. 경전의 가르침은 이러한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내리신 약방문(藥方文)과 같습니다. 한 달 동안의 화엄산림 법문도 여러분께 전하는 약방문, 바로 약입니다. 

법문은 그냥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삼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화엄산림 법사 스님들의 법문 내용은 여러분이 계신 곳 어디에서든, 또 언제라도 핸드폰과 컴퓨터, TV를 통해서 영상으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환희로운 일입니까. 그런데 약은 받았지만, 복여불복(服與不服), 그것을 안 먹는 사람도 있고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약을 믿고 잘 드셔서 마음의 병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만드는 것은 오직 여러분의 몫입니다.

안선불필수산수(安禪不必須山水) 
멸득심두화자량(滅得心頭火自凉)

산수가 수려하고 공기 청정하며 물 맑은 곳에서 탁 마음을 비우고 참선을 하면 참선이 절로 된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사회생활을 해야 하고 직장에 나가야 하고 살림을 살아야 합니다. 산수 좋은 곳에서 참선하면 좋은 줄 알지만 그것이 뜻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에 일어나는 불꽃, 이것을 소멸시키면, 시원한 산수에 앉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산수 좋은 곳, 깊은 산중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불 끓듯이 끓어오르면 덥기만 합니다. 직장에 다니든 아파트에 살든 자기 일에 종사하면서도 마음의 불꽃을 잠재울 줄 안다면 그곳이 바로 시원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화엄산림 동안에 마음 불이 일어나는 것을 제압할 수 있는 그런 약 법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 걱정할 것 없습니다. 회향을 잘하셨습니다. 입과 눈과 코와 귀 등 육근(六根)에서 일어나는 모든 병통은 화엄법문을 들음으로 인해서, 그 약 법문을 들음으로 인해서 다 소멸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걱정 없이 잘 살 수 있다, 그런 것을 여러분께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주지 스님께서 먼저 소개 말씀을 했기에 아직 취임까지는 기간이 남았습니다만 여러분께 먼저 인사를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스승과 상좌 간에 종정이 되는 것은 통도사가 처음입니다. 사실 저는 은사스님께 상좌답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스님께 잘한다는 소리 한 번도 못 듣고 항상 꾸지람을 들어야 했습니다. 솔직히 꾸지람을 들을 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돌이켜보면 은사 스님께서는 상좌가 종정이 될 수 있도록 키워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아들, 딸 키워 보셔서 아실 겁니다. 부모의 마음,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은사 스님께서는 참으로 훌륭한 부모이고 스승이셨습니다. 이제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번 화엄산림에 영단 위패를 모신 분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통도사 화엄산림을 통해 우리 사부대중은 물론이며 많은 영가도 법문을 듣고 심지어는 무주고혼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이 도량에서 법문을 들으며 고(苦)를 여의고 락(樂)을 얻어서 해탈(解脫)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지니셨을 것입니다. 조상에 대한 은혜를 일찍이 잘 깨달으셔서 이렇게 모시고 법회에 동참해 오신 여러분이 참으로 장하고 훌륭합니다. 저는 은사스님의 큰 가르침을 진작 깨닫지 못해서 그렇게 잘 모시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은사스님을 잘 모시는 마음으로 종단의 소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서원을 올리며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1월2일 영축총림 통도사 설법전에서 봉행된 ‘불기 2565년 화엄산림 대법회 회향법회’에서 방장 성파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616호 / 2022년 1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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