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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시대의 불교] 3. 한국 고대의 불교의학

스님은 가난한 백성 치료하고 정신적 위안 준 최고 지식인

불경 읽고 암송하는 과정에서 의학적 지식 자연스레 갖춰
청결 유지하며 승가 내 질병 예방…사찰에 병원·간병승도
진언 통해 안정감 제공…중국서도 몰랐던 약재 효능 밝혀 

통일신라 조성된 청양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성조대좌(국보). 
통일신라 조성된 청양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성조대좌(국보). 

인간이 심성적으로 가장 나약해진 시기 가운데 하나는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이다. 이에 일찍부터 종교에서는 질병 치료를 중시해왔다. 한국고대 사회에서도 불교가 전파되는데 불교의학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라 아도 화상이 눌지왕의 딸 성국공주를 치료한 인연으로 최초의 사찰 흥륜사가 건립되었다거나(‘삼국유사’ 권3), 해인사가 애장왕(788~809)의 왕비를 치료한 인연으로 창건되었다는 설화는 불교 의학이 불교 세력이 확장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선덕여왕 5년 3월조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병이 났는데 의사와 기도도 효험이 없자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고 승려를 모아 ‘인왕경’을 읽게 했다. 또  승려 100인이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후부터 호국경전인  ‘인왕경’을 읽고 승려를 출가시키는 것은 국왕의 질병을 치료하는 하나의 의례가 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당시 선덕여왕의 치병을 설화로 전하고 있다. 

“선덕왕 덕만이 오랫동안 병중에 있었다. 흥륜사의 승려 법척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병을 치료하였지만, 오래되도록 효험이 없었다. 이때 밀본 법사의 덕행이 나라 안에 소문이 나 있었으므로 좌우 신하들이 왕께 밀본 법사로 바꾸기를 청하였다. 왕이 그를 궁 안으로 불러 맞이했다. 밀본 스님은 왕의 침실 밖에서 ‘약사경’ 읽기를 지극히 하더니 가지고 있던 육환장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서 늙은 여우 한 마리와 중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거꾸로 내던지니, 왕의 병이 이내 나았다. 이때 밀본 스님 이마 위로 오색의 신비스러운 빛이 비치니, 보는 사람이 모두 놀랐다.”

5세기 초 무의와 대결하였던 아도 법사와 달리 6세기 후반에 이르면 누구의 치유력이 더 나은지 스님들 간의 대결로 변질된 것을 보여준다. 밀교 승려였던 밀본 법사는 이후 왕실의료를 담당하였던 흥륜사를 장악하였다.

한국고대 사회에서 스님들은 한문 경전을 읽을 수 있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불교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의학적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금광명최승왕경’의 제병품에는 “풍병에는 미끈한 기름 먹이고, 열병에는 대소변 잘 내리게 하며, 가슴병에는 변화에 따라 토하게 하나 (종합된) 총집에는 세 가지 모두 써라. 풍․열․담 같이 난 병, 이름하니 총집일세. 병난 것 알았다면, 본성에 따라 살펴보라. 이와 같이 보고 알고, 때에 맞게 약을 쓰되 음식과 약 차이 없게 하면, 이름하여 훌륭한 의사”라고 하였다. 

불교 게송을 외우다보면 저절로 의학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외에도 ‘사분율’의 간병계에 따르면 승려는 기본적인 의약지식을 가져야 했고 부처님의 말씀으로 병자의 심신을 함께 치료해 줄 수 있어야 했다. 특히 ‘십송율’ ‘사분율’ ‘마하승기율’에는 사찰에서 지켜야 하는 규율로써 목욕과 양치, 대소변 보는 법, 손 닦는 법 등 오늘날 위생에 해당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질병을 예방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당시 이러한 위생 개념은 불교 사찰문화가 되어 민간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692년 신라에 최초의 의과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의학이 설립되어 전문적인 의사집단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승려는 전문적인 의술을 펼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752년 편찬된 ‘외대비요’에서 인용한 고구려 노사의 처방은 각기충심(脚氣衝心) 질병을 오수유와 모과를 다려먹는 치료법으로서 곧 중국에서 여러 의가(醫家)의 처방으로 전환되었다. 이 사례는 고구려에서도 승려가 의술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나라 때 유명한 천태지의 스님은 인간은 날 때부터 무명혹(無明惑)이라는 심병(心病)에 걸려있어 숙명적인 질병, 즉 업병은 사람들 생명에 실재하는 부처의 생명을 가리고 있어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인한 의지와 노력을 가지고 번뇌를 깨쳐야 한다고 하였다. 

천태지의 스님의 제자 중 고구려에서 온 변사(辯師)는 최면 치료에 능하였다. 그는 목의 혹을 치료하는데, 환자에게 자신의 혹을 혹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벌집에서 새끼벌이 다 날아가서 구멍 투성이가 된 집이라고 가상하라고 지시하였다. 환자는 고름이 흘러 내려서 혹이 빈 벌집 같이 된 상황을 상상해서 치료하였다고 한다. 또 백제 관륵(觀勒) 스님은 602년 일본에 가서 서생 3~4인에게 역서와 천문지리서, 둔갑 방술서 등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방술에는 의술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삼국시대의 승려는 의학도 겸비하였던 최고 지식인이었다.

 사찰 내에서는 집단 생활을 하는 승려들 가운데 아픈 승려들을 돌보는 병원 또는 병방이라는 공간과 간병승들이 존재하였다. 선종에서는 이를 연수당, 성행당이라고 하였다. 즉 사찰은 병자를 치료할 수 있는 공간과 인력을 모두 가진 곳이었기에, 고대사회에서 질병 치료에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질병을 세분화하여 인식하고 치료법을 강구하였는데 ‘불설치주경(佛說治呪經)’ ‘불설주목경(佛說呪目經)’ ‘불설주시기병경(佛說呪時期病經)’ ‘불설주소아경(佛說呪小兒經)’ 등 치과, 안과, 전염병을 의미하는 시기병, 소아과 등이 세분화돼 질병에 알맞은 각종 주문이 남아있다. 이는 질병을 세분화하여 인식하고 그에 맞는 치료책을 개발한 것을 의미한다. 

당시 약재는 소수 지배층에 의해 독점돼 일반민의 입장에서 치료에 약을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해당 주문을 외우면서 기도하는 주술적인 방법은 큰 경제적인 부담이 없었기에 불교 의학이 대민 의료로 자리 잡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주술적인 치료는 고대 샤머니즘적 전통과 연계되어 불교 의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환자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었을 것이다.

984년 편찬된 일본의 ‘의심방’에는 ‘백제신집방’ ‘신라법사방’에서 인용한 처방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경덕왕(재위 742~764)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신라법사방’의 복약송은 “동방에 계신 약사유리광불과 약왕보살, 약상보살 및 기파 의왕, 설산동자에게 귀의하오니 영약을 베풀어 환자를 치료해 사악한 기가 소멸되어 없어지고, 선신(善神)이 도와 오장이 평화롭게 되고, 육부가 순조롭게 되며, 70만 맥이 저절로 통하고 펴지며, 팔다리의 사지가 강건해지고 수명이 연장되며, 언제든지 가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제천이 보호하여 주소서. 사바하!”라고 외운 뒤 동쪽을 향해 한번 외우고 약을 복용하는 방법이었다. 이는 약의 효능을 높여 환자에게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즉 주문은 환자의 심신 안정을 통해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신라법사방’에서 말벌집을 태워서 그 재를 이용한 노봉방 치료법과 복부에 생긴 적취(積聚)를 속수자로 만든 약술로 치료하는 것은 당시 신라 불교의 치료법이 중국의학보다는 신라의 경험방에서 유래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이는 8세기 초 당나라 상주에 있는 풍병으로 걷지 못하는 환자가 길거리에 나와 다리 고쳐줄 사람을 기다리다가 신라유학승의 도움으로 치유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이름이 전하지 않는 이 신라 스님은 중국식 약재명을 전혀 모르고 오직 신라식 향명만 알고 있었다. 신라의 스님이 현지인과 함께 산에서 채취한 약재는 위령선이었다. 이 약을 복용 후 10년 동안 걷지 못하고 앉은뱅이였던 환자가 거뜬히 걷게 되자, 이를 보았던 당나라 상주 사람 등사제는 장안으로 가서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궁중에서 실험한 결과 효험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 ‘본초서’에 위령선의 약효가 등재가 되고, 등사제는 어의가 되었다. 

이현숙 연세대 의학사연구소 객원교수 한국생태환경사연구소장
이현숙 연세대 의학사연구소 객원교수 한국생태환경사연구소장

위령선의 약효는 중국에서조차 모르던 것이었는데, 신라 승려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요컨대 신라의 불교의학은 한반도에서 전해져 토착 경험방을 계승 발전 시킨 주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 불교 의학이 중국의학의 영향보다는 토착적인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왕공 귀족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치료하였던 신라 스님들이 외국에서 수입하였던 당약은 너무 비싸 대부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향약으로 치료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공적 의료체제는 왕공귀족들만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경제적인 이유로 사적 치료조차 받지 못하였을 일반 백성들에게 의학지식을 가진 스님들은 정신적인 위안뿐 아니라 실질적인 치료의 혜택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이현숙 연세대 의학사연구소 객원교수 한국생태환경사연구소장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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