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3. 법화경변③-비유품

기자명 오동환

‘불타는 집’ 비유로 정견 없는 행복의 무지 가시화

‘법화칠유’로 방편·불지견의 관계 설명
불가사의한 교의에 대한 직관적 접근
세 아이 춤과 야차·괴수 위협 극대조
천진한 모습 ‘소박한 행복’도 느껴져
경전 메시지 풍부하게 체득하는 공간

막고굴 61굴 법화경변 ‘화택유’ 중 가옥 안의 아이들. 서로 장단을 맞춰 가무를 즐기는 모습이 천진하고 즐겁다.
막고굴 61굴 법화경변 ‘화택유’ 중 가옥 안의 아이들. 서로 장단을 맞춰 가무를 즐기는 모습이 천진하고 즐겁다.
막고굴 61굴 법화경변 중 ‘화택유’ 전체장면. 즐거워 하는 아이들과 화염·나찰·괴수에 휩싸인 저택의 상황이 극한 대조를 이룬다. 문 앞에는 세 가지 수레가 보이고, 우측에는 저택서 나온 아이들을 교화하는 장자의 모습이 보인다.
막고굴 61굴 법화경변 중 ‘화택유’ 전체장면. 즐거워 하는 아이들과 화염·나찰·괴수에 휩싸인 저택의 상황이 극한 대조를 이룬다. 문 앞에는 세 가지 수레가 보이고, 우측에는 저택서 나온 아이들을 교화하는 장자의 모습이 보인다.

‘법화경’에서 방편품은 삼승(三乘)의 방편을 펼쳐서 일불승(一佛乘)으로 중생을 이끈다는 이른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대의를 밝히는 총강령에 해당한다고 했다. 고대 돈황의 화사(畫師)들은 이 뜻을 석가모니불의 열반도를 이용하여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경전에서는 비유라는 방편을 통해 교설을 펼친다. 경에서 설하기를, “내가 성불한 이래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비유로 널리 가르침을 펼쳤으며,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들을 인도하여 모든 집착을 떠나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여래가 방편바라밀과 지견바라밀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법화경에서 역시 이른바 ‘법화칠유(法華七喩)’라 하는 갖가지 비유를 통하여 방편과 불지견의 관계를 설하고 있다. 

비유는 대개 간단한 서사를 통하여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석굴 내에서 경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제삼의 교법으로서도 유용하며, 때로는 부사의(不思議)한 교의의 경계에 직관적으로 접근하게 하는 데 보다 효과적이다. 

여기 하나의 장면이 있다(그림1). 한 가옥 안에 세 아이가 있다. 가운데 아이는 무용복을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이다. 양쪽의 두 아이는 악기를 들고 반주를 하고 있다. 서로 장단을 맞춰 춤추고 연주하는 모양새가 마냥 흥겹고 즐겁다. 어렴풋이 보이는 표정에서도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미소가 비친다. 

그런데 저택의 상황이 묘사된 화면(그림2)을 보면 그리 사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노는 가옥 주변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있으며, 마당에는 온갖 괴수와 야차들이 가득하다. 어떤 괴수는 불을 뿜으며 위협하고, 어떤 야차는 괴수를 타고 담을 뛰어넘어 오고 있다. 어떤 괴수는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야차는 괴수의 머리를 하고 있다. 또 어떤 야차는 괴수를 들고 내동댕이치려고 한다. 이 화마와 괴수들이 언제 가옥 안으로 닥칠지 모를 아수라장의 형국이 가옥 안의 아이들 모습과 극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오대(五代)에 조성된 막고굴 61굴 남벽의 법화경변 중에서 비유품의 화택유(火宅喩)를 묘사한 부분이다. 아이들의 아버지인 장자는 자신의 저택이 온통 타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도 아이들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불타는 집에서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저택 앞에는 세 가지 수레가 나란히 서 있다. 제일 오른쪽의 수레는 사슴이 끄는 수레이며 가운데 수레는 양이 끄는 수레이다. 가장 왼쪽의 수레는 소가 끌고 있는데, 다른 수레들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 장자는 아이들이 놀이를 좋아하는 점을 고려해서 방편으로 밖에 신나고 재미있는 여러 탈 것들이 있으니 나와서 타고 놀라고 얘기한다. 그제야 아이들은 흥미를 갖는다. 화면에서 저택의 정문을 나서는 아이처럼 하나둘 불타는 저택을 빠져나온다. 아이들은 장자에게 밖으로 나왔으니, 이제 사슴, 양, 소 등 갖가지 탈 것을 달라고 조른다. 장자는 그들에게 소가 끄는 화려하고 커다란 수레를 공평하게 나누어준다. 왜냐하면 그의 창고 안에는 이러한 수레와 보화가 누구에게나 나누어줄 만큼 무한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중생들이 삼계(三界)라는 썩고 낡고 불타는 집에서 태어나, 생로병사에 시달리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고뇌하며, 어리석고 아둔한 삼독의 불에 휩싸여 있으니, 이를 제도하고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불지견을 얻게 하려는” 방편이며, 그에 대한 비유이다. 이때의 양이 끄는 수레·사슴이 끄는 수레·소가 끄는 수레는 각각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을 상징하며, 흰소가 끄는 큰수레는 곧 일불승을 상징한다. 61굴의 변화경변에서는 황우가 끌고 있지만 크고 화려한 수레를 묘사하여 이것이 보살승과 일불승을 중첩적으로 상징하도록 하였다. 

법화칠유는 ①앞의 화택유를 포함하여, ②가난한 아들을 먼저 머슴살이 하게 한 후 나중에 아들임을 밝힌 궁자유(窮子喩), ③각기 다른 초목들에 같은 비를 내려 각자에 맞게 성장하게 한다는 약초유(藥草喩), ④보배를 찾는 길 중간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가짜 성을 만들어 쉬게하고 다시 길을 독려한다는 화성유(化城喩), ⑤먼길 가는 친구가 옷 안에 넣어준 보주를 모르고 곤궁하게 살아가는 다른 친구를 일깨워 준다는 의주유(衣珠喩), ⑥전륜성왕이 상투 속의 구슬은 가장 전공이 큰 자에게만 준다는 발주유(髻珠喩), ⑦의원이 독약을 먹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이 사망했다고 알려 약을 먹게 한다는 양의유(良醫喩)이다. 61굴의 법화경변에는 중당(781~848) 이후 교의를 중시하는 경향을 이어받아, 핵심교의를 담고 있는 법화칠유를 모두 곳곳에 배치하여 표현하였다. 

경전의 시각적 표현이 주는 묘미는 참배자에게 경전이 주는 메시지를 보다 풍부하게 사고하고 체득할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가옥 안 아이들의 모습은 오욕(五慾)을 추구하는 우리네 모습을 대변한다. 한편으로 화면에 표현된 아이들의 꾸밈없이 마냥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면 ‘소박한 행복’도 느껴진다.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 놀이에도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생활은 복잡한 세상사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들이 한 번쯤 꿈꿔봤을 안식의 삶일 것이다. 그러나 61굴의 화택유 장면은 전체를 꿰뚫는 정견을 갖지 않고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스스로 불길 속에 내던져지는 무지에 불과함을 가시화하고 있다. 성찰이 깊을수록 진정한 삶의 재미를 알아간다.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ory88@qq.com

[1641호 / 2022년 7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