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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행의 일상성

수행을 위한 삶 아닌 삶을 위한 수행이 절실

불상 앞에서 삼천배하는 것은 기복이 아닌 불성 확인하는 과정
‘자, 비, 희, 사’ 네 아이 둔 어머니 마음처럼 가르침 일상화해야
붓다로 살려는 참뜻은 일상에서 철저하게 수행하겠다는 결의

조성택 교수는 “이백오백년 불교전통에서 강조해 온 깨달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삶과 분리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진은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대탑. [유네스코본부]
조성택 교수는 “이백오백년 불교전통에서 강조해 온 깨달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삶과 분리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진은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대탑. [유네스코본부]

불교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왜 하는 것일까? 

어떤 분들은 계정혜 삼학이라고 답하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간경, 염불, 주력, 참선이라고 할 것이며 또 어떤 분들은 견성, 확철대오 등의 말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단어들은 불교수행과 관련된 말이긴 하지만 불교 수행의 목적과 방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엔 모호해서 충분치 못하다. 추상적일뿐 아니라 비일상적 언어들이어서 일상적 실천을 위한 구체성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해서 새삼 강조하기에 거북스럽지만, 수행은 제대로 잘 살아가기 위함이다.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알아야 하고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해야 하고, 내 자신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수행은 이 모든 과정을 일관하는 것이고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수행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수행이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수행관련 단어들은 수행 그자체가 아니라 수행의 여러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특별히 ‘불교’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 과정의 출발 그리고 실천의 근거와 목적을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오랜 불교전통이 전승해온 전통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과 수단은 관련되어 있지만 그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삼천 배를 하건 용맹정진을 하건 그것들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오늘날 한국의 불자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수행의 목적을 견성이니 확철대오니 하는 최종적인 깨달음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이 그랬거니와 이천오백년 불교 전통에서 강조해 온 깨달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불교의 깨달음을 일종의 ‘체험’ 혹은 순수경험, 신비적 경험으로 이해하게 된 데에는 불교수행 대한 근대적이며 서구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바드대 교수를 역임한 원로 불교 학자 로버트 지멜로(Robert M. Gimello)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깨달음을 다양하고 복합적인 것 즉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깨달음이 그것에 이르는 수단과 결코 분리된 하나의 [독립된] 목적이거나 깨달음의 실현이 수행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사실은 불교 전통에서 [깨달음의] 실현과 수행이 일체(unity)라는 것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혹은 수행이 [깨달음의] 실현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의 방식으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깨달음을 전적으로 자발적인(autonomous), 자체발생적인(self-generated), 그리고 완전히 선험적인(transcendent) 경험으로 여기려는 경향에 대한 일종의 주의/경계라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실제로 이 점은 [불교적]깨달음을 일종의 ‘경험’---순수경험, 종교적 경험 혹은 신비적 경험 등---으로 이해하는, 근대적이며 다분히 서구적인 관점을 차단하는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 [Robert Gimello, ‘Bodhi’ Encyclopedia of Buddhism, ed., by Robert Buswell, Macmillan (Thomson & Gale), 2003, vol. 1, pp. 51~52]”

요컨대 수행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 이래 교학전통에서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 교학전통에서 깨달음(bodhi)을 깨달음을 구성하는 요소 즉 보리분법(bodhipaksa)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수행의 최종 도착지로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구성하는 요소를 통해 깨달음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불상(佛像) 앞에서 삼천 배를 하는 것은 불상에게 복을 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불성(佛性)을 확인하는 과정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참선을 하건 염불을 하건 어떤 특별한 ‘체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보고 제대로 살기 위한 노력들일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정도와 자·비·희·사의 사무량심(四無量心), 대승불교가 강조하는 바라밀 그리고 동아시아 선사들이 강조했던 행주좌와, 어묵동정 등은 일상의 수행과 수행의 정도를 가늠하는 실천의 장(場)이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강조하신 팔정도 그리고 출재가 공히 일상의 실천으로 강조하신 자·비·희·사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불교적 삶과 일상의 수행이 어떠해야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연기법, 오온, 무아 등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가 삶에서 실천되는 구체적 모습이 팔정도, 사무량심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팔정도와 사무량심은 삶과 수행 그리고 깨달음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다. 불자라면 누구나 부처님께서 어떻게 사셨을까 궁금해 한다. 부처님의 생애를 공부하고 불교의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것은 지식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우고자 함일 것이다. 팔정도는 부처님께서 살아가신 일상의 모습이며, 자·비·희·사 사무량심(四無量心) 또한 부처님께서 세상을 대하신 일상의 태도다.  

지난 연재에서, ‘붓다로 살자’는 ‘부처인 척’ 부처흉내를 내는, 위선의 삶이 아니라 부처를 닮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내 안의 부처를 키워가고자 하는 일상의 약속이라고 했다. 팔정도를 두고 말한다면 팔정도는 부처님이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습이었으며,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수행의 로드맵이다. 요컨대 부처로 살아야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수행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거나 막행막식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곡해한다면, 이는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불교적 지식이 많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연기, 무아, 오온에 ‘대해’ 많이 알고 경전 구절과 선사들의 오도송을 줄줄이 꿰고 있다 하더라도 팔정도의 일상이 아니고 자비희사의 실천이 없다면 불자로서의 삶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팔정도는 팔만사천 법문이 구체적 삶으로 드러나는 실천의 장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무량심(四無量心)에 대한 붓다고샤의 설명은 불교가 관념적 교리 묶음이 아니라 일상적 실천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붓다고샤는 자·비·희·사의 실천을 네 아이를 둔 어머니의 마음에 비유한다. 어린자식에게는 보살피고 돌보는 자(慈)의 마음을, 병이 나서 아픈 자식에게는 비(悲)의 마음을, 삶이 즐거운 한창 나이의 자식에게는 희(喜)의 마음을 그리고 장성하여 자신의 일에 바쁜 자식에게는 사(捨)의 마음이다. 쉬운 말이다. 누구나 바로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다만 이러한 마음을 자식에서 시작하여 주변, 그리고 세상 모두, 심지어 ‘원수’에게 까지 확대해 가는 실천이 어려울 뿐이다. 붓다로 살고자 하는 것은 수행을 건너뛰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철저히 수행하겠다는 결의요, 발보리심을 확인하는 일이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43호 / 2022년 8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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