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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스스로 깨닫기

기자명 승한 스님

백억의 말이 모두 부질없는 성찬

파격·역설로 읽는 이들을 흡입
평생 말한 것을 ‘재잘’로 표현
깨달음 주체·스승은 자신 강조
죽음 전에 구업 무거움 알아야

평생을 부끄럽게 입으로만 재잘대다/ 끝에 와서 분명 알았다, 백억의 말 저편임을/ 말이 있어도 말이 없어도 모두 틀리니/ 모두 엎드려 모름지기 스스로 깨닫기를 청하라.

平生慚愧口喃喃(평생참괴구남남)
末後了然超百億(말후요연초백억)
有言無言俱不是(유언무언구불시)
伏請諸人須自覺(복청제인수자각)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

파격과 역설. 선시의 매혹은 바로 그 기상천외한 파격과 역설에 있다. 파격과 역설이 없으면 선시의 감동은 1도 없다. 이 선시도 첫 행부터 파격과 역설로 읽는 이들을 흡입한다. 평생 동안 말하고 산 것을 “재잘”댔다[喃喃]고 한다. 

그런데 그 재잘거림이 보통 재잘거림이 아니다. (참새처럼) ‘혀를 빠르게 놀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재잘’거리는 것이다. 자신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살았는지도 모를 만큼, 수천수백억의 말을 (함부로) 쏟아내고 살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또 “부끄럽”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끝판(임종)에 와서야 비로소 “요연”히(똑똑하고 분명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백억”의 말[言] 모두가 저편의 한낱 부질없는 말의 성찬이었음을.

여기서 다시 한 번 파격과 역설이 일어난다. “말이 있어도” 틀리고, “말이 없어도” 틀리단다. 이 곤경을, 이 궁지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이 궁리, 저 궁리, 이 수행, 저 수행 끝에 일선 선사는 그것이 “자각”(自覺: 스스로 깨달음)임을 선언한다. 그것도 “모름지기”[須]. “복청제인”(伏請諸人: 모두 엎드려 청하다)이라는 시구도 퍽 재밌는 역설이자 파격이다. “스스로 깨닫”되[自覺], 그 자각 앞에 납작 엎드려 스스로에게 “스스로의 깨달음”을 청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섬’ 삼아, ‘등’(燈) 삼아, 낮고 겸손하게, 자신에게로 이르라는 것이다. 결국 깨달음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그 스승 또한 ‘자기 자신(스스로)’이라는 것이다.

역설과 파격의 미학. 이 같은 선시의 문법을 알고 읽으면 그 맛의 일미(一味)가 더한층 도드라진다. 일선 선사의 이 선시도 그렇게 뜯어 읽어야 감동의 진폭이 더 크고 넓다. 그 ‘언어 뒤에 숨어 있는’[언어도단(言語道斷)] 무의미의 의미에도 더 알기 쉽게 가 닿을 수 있다. 

우리가 선시를 주워 먹는 것도, 그리고 그것에 배가 부른 것도 그 무의미의 의미가 주는 진짜 삶의 영양소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형된 상식을 깨뜨리고 게으른 정신을 당황케 하며 나태한 마음을 신선하게 깨부순다. 그 절연의 난해성과 문법이 우리를 ‘진짜 삶’[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로부터의 해방]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사람들은 왜 죽음에 임해서야 ‘자신의 말 많은 삶’을 후회할까? 살아서는 그리도 잘났다고, 옳다고, 내 말대로 하라고 떠벌리고, 주장하고, 가르치던 사람들이 임종에 이르러서야 그 같은 삶이 부끄러웠노라고 고백할까. 구업(口業)의 무거움을 그때서야 체득(體得)하기 때문일 터다. 아니, 한평생 재잘거린 말들이 허망한 허상이었음을, 자신이 뿜어낸 독(毒)이었음을 인생무상을 통해 깨우쳤기 때문일 터다. 

성인군자나 보통사람이나 죽음에 이른 순간엔 그걸 저절로 느낀다. 임종에 이르면 모든 인간들이 침묵(묵언)에 드는 것이 그 증좌다. 다만 성인군자는 침묵 뒤의 자신을 알고 가고, 보통사람은 침묵 뒤의 자신을 알지 못하고 갈 뿐이다. 성인군자는 그것이 말(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입을 닫고, 보통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입을 닫는 것이다. 필자의 아버지도 그랬다. 아니, 필자의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씀 한마디도 못하고 오랜 시간 침묵하다 돌아가셨다. 그 침묵의 아픔이 필자를 더욱 아프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삶과 죽음은, 세상사의 문법은 ‘불이’(不二, Non-duality)다. 극락과 일상이 둘이 아니고, 열반(깨우침)과 무명(無明)이 둘이 아니다. 정관일선 선사는 세상사 둘이 아닌 문법을 지금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깨닫고[自覺] 살라”고. 그래야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승한 스님 빠리사선원장 omubuddha@hanmail.net

[1645호 / 2022년 8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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