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승복 짓는 바느질 땀마다 부처님 가르침도 새깁니다”

  • 무진등
  • 입력 2022.08.29 15:43
  • 수정 2022.09.02 11:15
  • 호수 1646
  • 댓글 0

윤승현 다운승복 대표

인연 이끌려 승복 짓기 결심…봉사활동·불교대학 참여하며 불자 돼
백천문화재단 보시 사업 동참·세종 광제사 문화체험관 승복 전시도
“보시 기쁨 알려주고 불연 맺어준 승복과 함께 불자다운 삶 서원”

윤승현 다운승복 대표는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승복을 지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했다. 승복은 그에게 보시의 기쁨을 알려주고 불연을 맺게해준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윤 대표는 “잊고 있었던 부처님 가르침을 승복 지으며 매 순간 되새기겠다”고 다짐했다.
윤승현 다운승복 대표는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승복을 지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했다. 승복은 그에게 보시의 기쁨을 알려주고 불연을 맺게해준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윤 대표는 “잊고 있었던 부처님 가르침을 승복 지으며 매 순간 되새기겠다”고 다짐했다.

조계사 인근에 자리한 건물 3층.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진열된 장삼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중앙에는 스님들과의 차담을 위한 탁자가 놓여 있고 주위에는 다양한 치수의 승복들이 진열됐다. 승복은 부처님 제자로서 불법을 믿고 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켠에 위치한 문을 열고 작업실로 들어서면 자, 실, 재봉틀 등 옷을 짓는 데 쓰이는 물건들이 보인다. 이곳에서 윤승현 다운승복 대표는 직원들과 함께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윤 대표는 밝은 얼굴로 맞아줬다. 

“어떻게 승복을 짓게 됐냐고요?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인연가피입니다.”

전남 목포에서 자란 윤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스님이 보이면 달려가 합장했다. 말을 붙이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한 스님은 동네 아이들이 보이면 과자와 사탕을 나눠주시곤 했는데 그도 앞다퉈 달려가 주전부리를 한 움큼 받아 쥐었다. 사찰과 스님은 그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친숙하고 편안한 대상이었다. 

“지금도 스님이 계시면 먼저 가서 인사드립니다. 어디서 오셨는지, 법명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쭈기도 하고요.”

사실 그의 첫 시작은 신사복이었다. 양복 입은 어른들이 멋있어 보였던 그는 지인에게 부탁해 양복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작업실에 먼지와 실밥들이 여기저기 날렸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이라 여름에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겨울에는 연탄불에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했다. 날카로운 자 모서리로 머리를 맞기도 했고 바쁜 날에는 몇 분 만에 도시락을 먹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 가게가 문이 닫힐 때까지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몸은 고됐지만 기술은 일취월장했다. 몇 년을 작업실에서 보냈을까. 마침내 가게를 갖게 됐다. 디자이너로서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주머니도 갈수록 두둑해졌다. 그가 만든 양복은 유행을 선도했고 어깨에는 더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양복점이 지역 건달들의 아지트가 되면서였다. 건달들은 그가 없는 날만 골라 양복을 외상으로 가져갔다.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많았다. 어떻게든 값을 받아냈지만 일부는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회의감이 몰려왔고 고심 끝에 가게를 접었다. 

“건달들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한다니 아쉬웠죠. 다행히 새로운 기회가 오더군요.”

당시 기업들은 신사복을 취급하기 시작하며 디자이너를 모시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도 연락을 받았다. 디자이너에서 패션업계로 진출하게 된 계기였다. 개발팀장으로서 디자인, 원단 선택, 마감, 시착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했다. 시중에 나오는 제품 중에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직원교육도 담당했다. 이후에는 분야를 넓혀 숙녀복도 담당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에 직접 공장을 설립하고 의류수출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은 순항했다. 베트남과 일본 등 여러 국가로 확장하고 100명이었던 직원은 어느새 3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점차 한계를 느꼈다. 술 한 잔 못하는 그였지만 계약을 위해 다른 회사 사장이 오면 도수 높은 중국술을 두 병씩 들이키고 골프 등의 접대도 해야 했다. 납기일을 맞추려고 밤새는 일도 잦아졌다. 과욕이 그를 망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사고가 났다.

그날도 수일을 내리, 잠 한숨 자지 않고 일한 뒤 물건을 트럭에 싣고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아내도 밤을 샜지만 졸음운전을 하지 않게 도와주겠다며 따라나섰다. 아내를 조수석에 태운 채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순간 ‘아차!’ 싶었어요. 저도 모르게 자고 있었던 거죠.”

고속도로 위를 달려야 했을 차가 높은 경사의 비탈길에 서 있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했을 때 순간적으로 졸아 도로를 이탈해버린 것이었다. 중국인 직원들에게 전화했다. 새벽이어서 그런지 받지 않았다. 문자도 보냈지만 언제 올지 몰랐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잠이 쏟아졌다. 너무 피곤했던 탓이었다. 다행히 해가 뜨자 직원들이 도착했고 그때 욕심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지체 않고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도착해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었다. 마냥 놀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종각으로 향했다. 이유도 몰랐다. 승복점들을 방문하며 승복 짓는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누가 기술을 가르쳐주겠는가. 계속해서 퇴짜를 맞았다. 끈질기게 찾아갔다. 마침내 다운승복과 인연이 닿아 기술을 배우게 됐다. 

“사실 아직도 왜 승복을 배우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부처님 인연가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평택에서 종각까지 매일 3~4시간씩 전철로 출퇴근하는 강행군이었지만 배우는 일이 재미있었다. 승복을 받아드는 날이면 꼼꼼히 살펴보고 이곳저곳 바느질은 어떻게, 마감은 어떻게 했는지 연구했다. 공장에서 배우기도 했지만 따로 시간을 내 독학까지 한 셈이다. 신사복, 숙녀복 등을 제작해오며 쌓인 경험이 빛을 발했다. 그렇게 그는 승복 짓기에 뛰어들었다. 이후 천안으로 거처를 옮겨 승복점을 열었다. 승복을 지으며 자투리 시간에는 불교공부에 매진했다. 중국에서 일어난 사고로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부처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천안 마이트리봉사단 무료급식 봉사에 참여했다. 설거지, 요리, 배식 등 모두 처음이었다. 그래도 굶주림으로 어두웠던 얼굴이 포만감으로 밝아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에 기쁨이 차올랐다. ‘이게 보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시간을 내 들렀다. 보시하는 그 순간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렸을 적 과자와 사탕을 나눠주시던 스님이 이런 기분으로 웃음 지으셨나 싶었다. 

천안 각원사불교대학에도 입학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도 좋지만 좀 더 제대로 된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봉사활동과 승복점 운영으로 바쁜 나날이었지만 짬을 내 열심히 다녔다. 공부에 또 공부, 그 과정에서 수행법도 배웠고 교리도 배웠다. 어렸을 적 뭣도 모르고 편안하게만 생각했던 불교가 심오하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알게 됐다. 불교대학을 졸업하며 ‘월탄’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윤 대표는 졸업 이후에도 각원사 경해학당에 입학해 불교공부를 이어오고 있다.

가게에 진열된 장삼들. 
가게에 진열된 두루마기들. 

천안에서 승복점을 운영해왔지만 결국 다시 다운승복으로 돌아왔다. 승복의 길로 안내해 준 인연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안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삶이 시작됐다. 그럼에도 시간이 날 때면 변함없이 봉사활동에 참여했고 보시도 꾸준히 실천했다. 경해학당에서 공부하기 위해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유년시절, 과자와 사탕을 들고 오시던 스님이 다운승복을 방문한 것이다. 

“그때 그 기분이란 형용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50여년 만에 뵌 스님은 그대로셨어요. 정말 환희로운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더욱 정성 들여 승복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불자로서 거듭난 그에게 좋은 일이 잇따랐다. 첫 번째는 백천문화재단과의 협약이었다. 평소 스님들을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을 실천하는 백천문화재단을 부러워했던 그였다. 이 협약으로 그는 백천문화재단 승복 보시 사업에 동참해 구족계를 수지한 스님들, 선방 안거를 마친 스님들을 위한 승복을 짓고 있다. 두 번째는 그의 승복이 최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건립된 신도시 포교 거점도량 세종시 광제사 한국불교문화체험관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가 정성 들여 지은 승복은 미래불자들에게 한국불교문화를 알리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최근 새로운 원력 하나를 세웠다. 바로 ‘산신도 보시’다. 다른 이가 펴놓은 복전에 동참을 했지만 정작 스스로 원을 세워 실천한 적은 드물었다. 윤 대표는 이를 위해 자투리 시간을 내 산신도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있으며 그림실력이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직접 그린 산신도를 사찰에 보시할 계획이다. 
 

“잊고 있었던 부처님 가르침, 이제는 보시를 통해 선업 지으며 매 순간 되새기겠습니다.”

어렸을 적 한 손엔 과자, 다른 손엔 사탕이 들려 있었던 두 손은 이제 바늘과 실이 쥐어져 있다. 그는 오늘도 두 손을 바삐 움직여 승복을 만들고 있다. 보시의 기쁨을 알려주고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준 승복. 앞으로도 승복을 짓는 바느질 땀마다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며 깨어있는 불자로 살아갈 것을 서원한다.

윤태훈 기자 yth92@beopbo.com

[1646호 / 2022년 8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