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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을 추모하며-하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22.10.11 13:06
  • 수정 2022.10.11 13:08
  • 호수 1652
  • 댓글 0

“어떤 경우라도 화내는 것은 옳은 게 아녀”

중생구제에 힘 쏟았던 노년이
때로는 장엄한 풍경처럼 보여
삶의 마지막까지 품위 지켜내
가르침 남기고 이젠 흩어지셔

“적음화 집보고 있을 거지?” 하시며 주지스님께서 외출을 나가신 기해년의 어느 날. 큰스님께서 전에 없이 승복을 단정히 입으시고 불편한 걸음으로 나오셔서 “죽비맞이를 해야겠다. 같이 가자.” 하셨다. 아직은 기억이 남아있고 걸으실 수 있는 때였는데 큰스님을 모시고 법당에 들어가자마자 어쩐지 지금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동영상을 촬영했고 그렇게 간신히 큰스님의 마지막 죽비맞이를 기록할 수 있었다.

큰스님 곁에서 머무는 시간동안 하루가 다르게 필자의 이름을 묻고 또 묻고, 오늘이 며칠이냐고 지금이 몇 시냐고 물어보시고, 승려로서의 일과를 잘 지키는지 제시간에 일어나서 먹고 예불시간을 알아차리고 신도와 소통하고 잠드는지를 필사적으로 확인하시던 순간들이 계속해서 지나갔다.

곁에 머무는 동안 당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들, 출가하고 있었던 일들, 상좌들을 길러내며 있었던 일들, 각각의 성품까지, 가감 없이 전달해주셨다. 그리고 빠트린 얘기가 있을까봐서 “내가 그 얘기했었나?” 확인하시던 시간들이 흘러갔는데, 어느 날은 앉아서 큰스님의 다리를 쓸어보면 따뜻하였고, 어느 날은 미지근하다가, 마지막엔 차디찬 나무같이 변해있었을 때에는 주무시고만 계셨다. 이미 그 하루하루에 서러움과 슬픔이 여러 번 밀고 쓸고 지나갔기 때문에 입적하신 이후에는 울지 않을 수 있었다.

범사에. 정답을 알고 계시던 분을 잃고 나서야, 공부가 부족하였고 이제 해답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절에서 기도하다 놀다 주지스님과 맛있는 것 먹다 잠든 필자가 누워있던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보시고 지켜보시다 나가시던 그 섬세한 모성을. 강인한 선생의 일관된 태도를, 이미 익어 더할 것이 없던 승려의 모습을, 어느 하늘에 가면 다시 뵐 수가 있을 것이며, 필자가 과연 이번 생 이후에 그 같은 하늘에 가 닿을 수 있을 것인가, 차마 계산이 안 될 그 거리를 생각하느라 큰스님의 장례는 아무렇지 않게 흩어졌다. 이미 가신 분, 찾아가 다시 뵐 궁리를 하자니 분주하였다.

“중생구제”

어느 날은, 절집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얘기를 쭉 하셨는데, 그 중에 모자라지만 잘난 척 하는 이, 그저 모자란 이, 잘나게 태어나 착하기까지 한 이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셨다. 그러나 결국 평등하게 만드신 그 원력을 충분히 이해하고 짐작하고도 남았다. “스님, 어째서 그 일들을 그저 덮으셨어요?” 하고 물었을 때 스님께서는 “중생구제” 라고 답변하셨다. 승려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답변하신 것이다.

“잘못했어요.”라고 선선히 대답하고 시정하는 필자의 모습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특하다고 하시던 그 모습을 뵙던 날에는, 마음속으로 ‘이 비구니 스님의 인생은 가르치다 죽으려고 만들어진 것인가. 정말로 이렇게만 사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감각과 의지가, 당장 절에 들어있는 중생 하나에 집중되어 있던 그 노년의 비구니의 모습이, 때로는 장엄한 풍경같이 보일 때가 있었다. 오직 수행자, 스님, 비구니, 승려 등으로 표현되어야 할 사람 하나만 거기에 서있고, 필자를 혼내러 힘든 걸음으로 달려오시고, 먹을 것을 내어다가 옆에 앉혀 먹이시는 각각의 변화만 있었다. 큰 산이 여러 가지를 담았어도 결국엔 산 이름 하나로 귀결되는 것처럼.

기특하다며 한달음에 달려오셔서 얼굴을 쓸어주시던 그 손길이, 이제 흙에도 없고 바람에도 없다는 것을 느낀다. 이제 가시고 안 계신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이 그 소리가 들리냐?”

강아지가 운다며 주지스님께서 얘기를 꺼내시자 저렇게 혼을 내시던 여름날이

“누가 너를 묶어놓으면 좋겠냐?”

강아지를 묶어놓자며 주지스님께서 얘기를 꺼내시자 또 혼을 내시던 그 날이

온 곳과 간 곳이 모두 흩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큰스님께서 몇 번이고 단호하게 가르쳐주시던 내용을 남겨본다.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는 것은 옳은 게 아니여.”

화를 내어야 하냐 말아야 하냐 갈등이 들 때마다 결국엔 이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과연 결과가 좋을 것인가 의심은 아직 들지만 이 가르침은 한 여성이 속세를 여의고 승려가 되어 삶의 마지막까지 비구니의 품위와 본분을 지켜내면서까지 전해주신 것이다. 가르침은 남기고 당신께서는 흩어지셨다. 필자가 아직 모르는 하늘로.

장연덕 칼럼니스트

[1653호 / 2022년 10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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